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문홍도(文弘道)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BB38D64DB3C4B1553X0
자(字)여중(汝中)
생년1553(명종 8)
졸년1603(선조 36)
시대조선중기
본관남평(南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문극(文剋)

[상세내용]

문홍도(文弘道)
1553년(명종 8)∼1603년(선조 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여중(汝中).

문익점(文益漸)의 후손으로, 부친은 문극(文剋)이다.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으로,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1593년 정언(正言), 다음해 지평(持平),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역임하고 홍문록(弘文錄)에 피선되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지냈다.

이어 장령(掌令)을 여러 차례 지내고, 평안도어사로 파견되었으며, 수원부사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에 이르렀다.

정언이 된 뒤 정인홍의 일파가 되어 북인(北人)으로 행세하였다. 이 당시 사간 김신국(金藎國), 헌납(獻納) 이이첨(李爾瞻), 정언 박승업(朴承業) 등과 함께 계(啓)를 올려, 송화현감(松禾縣監) 이귀(李貴)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박대수(朴大秀)의 부정을 들어 탄핵하여 체직시켰고, 좌승지 민몽룡(閔夢龍), 양주목사 허흔(許昕) 등도 파직시켰다.

특히, 남인의 영수였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강화를 주창하였다고 하여 탄핵, 체직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임진왜란 때는 정인홍 등과 함께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유성룡이 밀려난 뒤 북인이 일시 정권을 장악함에 그 역시 득세할 수 있었으나, 곧 유성룡 탄핵사건 때문에 크게 현달하지 못하고 광해군 때는 아들의 불륜행위 때문에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이태진(李泰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