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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몽룡(閔夢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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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치운(致雲)
호(號)운와(雲窩)
생년1550(명종 5)
졸년1618(광해군 10)
시대조선중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상(閔祥)
증조부민효증(閔孝曾)

[상세내용]

민몽룡(閔夢龍)
1550년(명종 5)∼1618년(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치운(致雲), 호는 운와(雲窩). 정국공신 민효증(閔孝曾)의 증손으로, 민상(閔祥)의 아들이다.

1584년(선조 17)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서 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성균관사예를 거쳐 1597년 동부승지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

그뒤 병조참지오위장을 지내며 주로 서반직에서 활동하였는데, 정인홍(鄭仁弘)이 적극 추천하여 예조참의호조참판을 거쳐 1599년 대사헌에 이르렀다.

이때 정계는 북인이 집권하면서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되어 정쟁을 일삼으니, 그는 대북의 편에 서서 소북을 공격, 소북의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을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사태가 역전되어 대북이 물러나면서, 역시 관작이 삭탈되었고, 그 이듬해 대북이 집권하여 다시 골북(骨北)과 육북(肉北)으로 갈리자, 육북에 가담, 이이첨(李爾瞻)과 뜻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소북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고,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이 집권하면서 중용되어 경기관찰사좌참찬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1618년 우의정에 올랐는데, 이때 제기된 폐모론(廢母論)을 강력히 주장하여 대비의 호를 삭제하고,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데 앞장섰다. 얼마 뒤 갑자기 폭질(暴疾)을 얻어 병사하고 이어서 그 처와 장남이 횡사하였다.

인조반정 후 관작이 추탈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