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인백(閔仁伯)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BFCC778BC31B1552X0 |
자(字) | 백춘(伯春) |
호(號) | 태천(苔泉) |
시호(諡號) | 경정(景靖) |
생년 | 1552(명종 7) |
졸년 | 1626(인조 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여흥(驪興)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민사권(閔思權) |
저서 | 『태천집』 |
공신호 | 평난공신(平難功臣) |
[관련정보]
[상세내용]
민인백(閔仁伯)
1552년(명종 7)∼1626년(인조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백춘(伯春), 호는 태천(苔泉). 민사권(閔思權)의 아들이며,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84년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전적을 지냈다. 사헌부감찰 때 서인 정철(鄭澈)의 일파라고 하여 안협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기근이 들었으나 백성들을 잘 무휼하고 진안현감으로 전임되었는데, 재임중 기축옥사 때 정여립(鄭汝立)이 현계(縣界)로 들어오자 군사를 동원하여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鄭玉男)을 잡아들였다. 이 공으로 예조참의에 승진되고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장례원판결사‧충주목사 등을 지내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황주목사로서 임진강을 지키다가 대가(大駕)를 따라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렀다.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천장문안관(天將問安官)‧청주목사 등을 거쳐, 1598년 여양군(驪陽君)에 봉하여졌다.
1604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서 또 명나라에 다녀와서 안변부사‧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고, 1621년(광해군 13)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태천집』이 있다. 시호는 경정(景靖)이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84년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전적을 지냈다. 사헌부감찰 때 서인 정철(鄭澈)의 일파라고 하여 안협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기근이 들었으나 백성들을 잘 무휼하고 진안현감으로 전임되었는데, 재임중 기축옥사 때 정여립(鄭汝立)이 현계(縣界)로 들어오자 군사를 동원하여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鄭玉男)을 잡아들였다. 이 공으로 예조참의에 승진되고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장례원판결사‧충주목사 등을 지내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황주목사로서 임진강을 지키다가 대가(大駕)를 따라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렀다.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천장문안관(天將問安官)‧청주목사 등을 거쳐, 1598년 여양군(驪陽君)에 봉하여졌다.
1604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서 또 명나라에 다녀와서 안변부사‧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고, 1621년(광해군 13)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태천집』이 있다. 시호는 경정(景靖)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人物考
國朝人物考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人物考
國朝人物考
[집필자]
김용덕(金龍德)
성명 : "민인백(閔仁伯)"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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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