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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서(洪仁恕)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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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응추(應推)
생년1535(중종 30)
졸년?(미상)
시대조선전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덕윤(洪德潤)
조부홍이평(洪以平)
증조부홍귀손(洪貴孫)
외조부유의신(柳義臣)

[상세내용]

홍인서(洪仁恕)
1535년(중종 30)∼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응추(應推). 홍귀손(洪貴孫)의 증손으로, 조부는 대사성 홍이평(洪以平)이고, 부친은 홍덕윤(洪德潤)이며, 모친은 유의신(柳義臣)의 딸이다. 형은 부제학 홍인경(洪仁慶)이다.

1555년(명종 10)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후, 의정부가 작성한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다. 1583년(선조 16) 사간원헌납이 되어 이이(李珥)의 거조(擧措)가 온당하지 못하며, 정철(鄭澈) 또한 사류들을 잘 모함한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스스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나, 곧이어 인척 민정명(閔定命)장령이 되자 상피(相避: 일정한 인척 관계에 있는 자는 같은 소속의 관청에서 근무하는 것을 피함.)하여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자 왕이 민정명에게 외방직을 맡게함으로써 홍인서도 계속 지평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후 예조정랑사헌부장령,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여, 간관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특히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이후, 선조서울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해 오자, 당시 개성부유수로서 동요하던 백성들을 효유하여 안정시켰으나,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러다가 1593년(선조 26) 호조참의가 되었지만 전란의 와중에서 병을 이유로 동궁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갈렸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司馬榜目
大東野乘
燃藜室記述

[집필자]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