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林──)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84AEBDC815D1562X0 |
이명(異名) | 임거정(林巨正) |
이명(異名) | 임거질정(林居叱正) |
생년 | ?(미상) |
졸년 | 1562(명종 17) |
시대 | 조선전기 |
활동분야 | 기타 > 도적 |
[상세내용]
임꺽정(林──)
미상∼1562년(명종 17). 조선 중기의 의적(義賊).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居叱正)이라고도 한다. 양주의 백정출신이다.
1. 행적
당시 척족 윤원형(尹元衡)‧이량(李樑) 등이 발호하고, 여러 해 연이어 흉년이 계속된 데다가 관리들의 수탈이 횡행하는 틈을 타 도둑의 괴수가 되었다. 날쌔고 용맹스러웠는데 자기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어지러운 사회를 틈타 처음에는 도당 몇 명을 모아 민가를 횡행하며 도둑질을 일삼았다.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로 진출하여 구월산 등지를 소굴로 하여 주변 고을을 노략질하였다.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의적의 행각을 벌이자, 이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결탁하여 내통하였다. 그리하여 관에서 잡으려 하면 미리 정보를 알고 달아났다. 조정에서 선전관을 보내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들 무리는 미투리를 눈 위에 거꾸로 신고 다니면서 행방을 감추었다. 선전관이 구월산에 들어가 그들의 행방을 찾다가 돌아올 적에 도둑들은 선전관을 잡아 죽였다.
1559년(명종 14) 집을 개성에 두고 개성근방에서 출몰하자 개성부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이 군인 20여명을 데리고 그들의 소굴을 습격하였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개성부유수에게 도둑의 두목을 잡으라는 엄한 명을 내렸다. 한달이 지나도 잡지 못하자 임금은 이에 수령들이 도둑잡기를 게을리하면 엄벌을 가하고 공을 세우면 후한 상을 내리라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작은 도둑무리만 잡았을 뿐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560년 8월에 들어서는 서울에까지 임꺽정과 그 일당이 출몰하였다. 장통방(長通坊)에서 그들을 잡으려 하자 활을 쏘아 부장(部將)을 맞히고 달아났다.
이때 임꺽정의 아내와 졸개 몇 사람을 잡았다. 그리고 임꺽정의 아내를 형조소속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 이해 10월에 들어서는 금교역(金郊驛)을 통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봉쇄하고 연도를 삼엄하게 경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봉산에 중심소굴을 두고 평안도의 성천‧양덕‧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등지에 출몰하며 더욱 극성을 떨었다. 이들은 황해도에서 빼앗은 재물을 개성에 가서 팔기도 하고 서울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겁탈을 일삼았다. 이리하여 황해도 일대는 길이 막혔다.
이들은 이때 벼슬아치의 이름을 사칭하고 감사의 친척이라고 가장하면서 관가를 출입, 정보를 알아내기도 하였다. 이해 12월에는 엄가이(嚴加伊)라는 도둑두목이 숭례문 밖에서 잡혔는데, 바로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徐林)이었다. 서림의 입을 통하여, 임꺽정일당이 장수원에 모여 있으면서 전옥서(典獄署)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이 탄로났다.
또, 이들은 평산 남면에 모여 그들의 도당을 여러 차례 잡아 그 공으로 영전한 봉산군수 이흠례(李欽禮)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도 서림의 입을 통하여 알아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여명을 모아 평산 마산리로 진격하였다. 그때 도둑무리는 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관군을 무찔러 부장 연천령(延千齡)을 죽이고 많은 말까지 빼앗아 달아났다.
이에 임금은 황해도‧평안도‧함경도‧강원도‧경기도 등 각 도에 대장 한명씩을 정하여 책임지고 도둑을 잡게 하였다. 이 무렵 서흥부사 신상보(辛商輔)가 도둑무리의 처자 몇 명을 잡아 서흥 감옥에 가두어두었는데, 백주에 도둑무리 1대가 들이닥쳐 옥사를 깨고 그들의 처자를 구출한 사건도 있었다. 이해 12월에 황해도에 순경사로 파견된 이사증(李思曾)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나 의금부에서 추고(推考)를 해보니 임꺽정의 형인 가도치(加都致)였다. 그리하여 그 책임을 물어 순경사 이사증은 파직, 추관(推官) 강려(姜侶)를 하옥하게 하는 조처를 내렸다.
이와같이, 5도의 군졸들이 도둑을 잡으려 내왕하는 동안 민심은 흉흉하였고, 또 관군의 물자를 대느라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고 무고한 사람들이 잡혀가 죽임을 당하였다.
1561년 9월에 평안도관찰사 이량은, 의주목사 이수철(李壽鐵)이 임꺽정과 한온(韓溫)을 잡았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들을 의금부에 데려와 조사를 하니 해주 출신의 군사인 윤희정과 윤세공이었다. 이들은 의주목사의 꾐에 빠져 거짓 자복하였는데 서림이 이들을 보고 가짜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이수철에게 그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다.
이해 10월에 임꺽정 일당이 해주에서 평산으로 들어와 대낮에 민가 30여호를 불태우고 많은 사람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서림을 통하여 임꺽정을 꾀어낸다는 방침을 바꾸고 새로운 조처를 모색하였다. 이에 황해도 토포사(討捕使)로 남치근(南致勤), 강원도 토포사로 김세한(金世澣)을 임명하여 정병을 딸려 보냈다.
이어 개성과 평양의 성내를 샅샅이 뒤지게 하였고 서울에는 동대문과 남대문 등에 수문장의 수를 늘리고 날짜를 정하여 새벽부터 일시에 수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 중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는 자는 달아났다. 이에 포졸들은 달아나는 자들을 잡아들였고 조금이라도 수상쩍으면 감옥에 넣어 온종일 서울은 호곡소리로 들끓었다.
한편, 정시(停市)하게 하기도 하고 모든 관청일을 중단하게 하였는데, 대신이 죽는 일 외에는 이런 조처가 없었던 일이었다.
또,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 도둑으로 끼어드는 일을 막기 위하여 수색을 금하게 하였고, 황해도에는 전세 전부를, 평안도에는 전세 절반을 탕감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소란이 심화되자, 의정부에서는 “토포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래 유둔하고 있어서 군민(軍民)이 곤궁, 피로하고 일도가 탕연하여 원망의 소리를 귀로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하고 일단 많은 도둑의 졸개가 잡혔으니 임꺽정을 잡는 일은 평안도‧황해도의 감사‧병사에게 맡기고 토포사를 올라오게 하였다.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의적의 행각을 벌이자, 이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결탁하여 내통하였다. 그리하여 관에서 잡으려 하면 미리 정보를 알고 달아났다. 조정에서 선전관을 보내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들 무리는 미투리를 눈 위에 거꾸로 신고 다니면서 행방을 감추었다. 선전관이 구월산에 들어가 그들의 행방을 찾다가 돌아올 적에 도둑들은 선전관을 잡아 죽였다.
1559년(명종 14) 집을 개성에 두고 개성근방에서 출몰하자 개성부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이 군인 20여명을 데리고 그들의 소굴을 습격하였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개성부유수에게 도둑의 두목을 잡으라는 엄한 명을 내렸다. 한달이 지나도 잡지 못하자 임금은 이에 수령들이 도둑잡기를 게을리하면 엄벌을 가하고 공을 세우면 후한 상을 내리라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작은 도둑무리만 잡았을 뿐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560년 8월에 들어서는 서울에까지 임꺽정과 그 일당이 출몰하였다. 장통방(長通坊)에서 그들을 잡으려 하자 활을 쏘아 부장(部將)을 맞히고 달아났다.
이때 임꺽정의 아내와 졸개 몇 사람을 잡았다. 그리고 임꺽정의 아내를 형조소속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 이해 10월에 들어서는 금교역(金郊驛)을 통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봉쇄하고 연도를 삼엄하게 경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봉산에 중심소굴을 두고 평안도의 성천‧양덕‧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등지에 출몰하며 더욱 극성을 떨었다. 이들은 황해도에서 빼앗은 재물을 개성에 가서 팔기도 하고 서울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겁탈을 일삼았다. 이리하여 황해도 일대는 길이 막혔다.
이들은 이때 벼슬아치의 이름을 사칭하고 감사의 친척이라고 가장하면서 관가를 출입, 정보를 알아내기도 하였다. 이해 12월에는 엄가이(嚴加伊)라는 도둑두목이 숭례문 밖에서 잡혔는데, 바로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徐林)이었다. 서림의 입을 통하여, 임꺽정일당이 장수원에 모여 있으면서 전옥서(典獄署)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이 탄로났다.
또, 이들은 평산 남면에 모여 그들의 도당을 여러 차례 잡아 그 공으로 영전한 봉산군수 이흠례(李欽禮)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도 서림의 입을 통하여 알아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여명을 모아 평산 마산리로 진격하였다. 그때 도둑무리는 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관군을 무찔러 부장 연천령(延千齡)을 죽이고 많은 말까지 빼앗아 달아났다.
이에 임금은 황해도‧평안도‧함경도‧강원도‧경기도 등 각 도에 대장 한명씩을 정하여 책임지고 도둑을 잡게 하였다. 이 무렵 서흥부사 신상보(辛商輔)가 도둑무리의 처자 몇 명을 잡아 서흥 감옥에 가두어두었는데, 백주에 도둑무리 1대가 들이닥쳐 옥사를 깨고 그들의 처자를 구출한 사건도 있었다. 이해 12월에 황해도에 순경사로 파견된 이사증(李思曾)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나 의금부에서 추고(推考)를 해보니 임꺽정의 형인 가도치(加都致)였다. 그리하여 그 책임을 물어 순경사 이사증은 파직, 추관(推官) 강려(姜侶)를 하옥하게 하는 조처를 내렸다.
이와같이, 5도의 군졸들이 도둑을 잡으려 내왕하는 동안 민심은 흉흉하였고, 또 관군의 물자를 대느라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고 무고한 사람들이 잡혀가 죽임을 당하였다.
1561년 9월에 평안도관찰사 이량은, 의주목사 이수철(李壽鐵)이 임꺽정과 한온(韓溫)을 잡았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들을 의금부에 데려와 조사를 하니 해주 출신의 군사인 윤희정과 윤세공이었다. 이들은 의주목사의 꾐에 빠져 거짓 자복하였는데 서림이 이들을 보고 가짜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이수철에게 그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다.
이해 10월에 임꺽정 일당이 해주에서 평산으로 들어와 대낮에 민가 30여호를 불태우고 많은 사람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서림을 통하여 임꺽정을 꾀어낸다는 방침을 바꾸고 새로운 조처를 모색하였다. 이에 황해도 토포사(討捕使)로 남치근(南致勤), 강원도 토포사로 김세한(金世澣)을 임명하여 정병을 딸려 보냈다.
이어 개성과 평양의 성내를 샅샅이 뒤지게 하였고 서울에는 동대문과 남대문 등에 수문장의 수를 늘리고 날짜를 정하여 새벽부터 일시에 수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 중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는 자는 달아났다. 이에 포졸들은 달아나는 자들을 잡아들였고 조금이라도 수상쩍으면 감옥에 넣어 온종일 서울은 호곡소리로 들끓었다.
한편, 정시(停市)하게 하기도 하고 모든 관청일을 중단하게 하였는데, 대신이 죽는 일 외에는 이런 조처가 없었던 일이었다.
또,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 도둑으로 끼어드는 일을 막기 위하여 수색을 금하게 하였고, 황해도에는 전세 전부를, 평안도에는 전세 절반을 탕감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소란이 심화되자, 의정부에서는 “토포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래 유둔하고 있어서 군민(軍民)이 곤궁, 피로하고 일도가 탕연하여 원망의 소리를 귀로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하고 일단 많은 도둑의 졸개가 잡혔으니 임꺽정을 잡는 일은 평안도‧황해도의 감사‧병사에게 맡기고 토포사를 올라오게 하였다.
2. 체포
이러한 속에 1562년 정월, 남치근은 서흥에서 군관 곽순수(郭舜壽)와 홍언성(洪彦誠)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를 올렸다. 『기재잡기(寄齋雜記)』에는 임꺽정이 잡힐 적의 정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남치근이 재령땅에서 진을 설치하니 임꺽정은 날쌔고 건장한 자만을 데리고 구월산에 들어가 있으면서 그 나머지 무리는 요소요소를 지키게 하였다. 산을 올라가며 계속 수색하며 남은 무리를 죽이자 임꺽정은 골짜기를 넘어 도망하였는데, 계속 민가를 수색하자 임꺽정이 군졸들이 혼란한 틈을 타 술렁거리자, 군졸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다가 서림이 “저 놈이 임꺽정이다.” 라고 소리쳐 끝내 상한 몸으로 잡혔다는 것이다.
임꺽정은 조정에서 그의 이름을 알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인 지 약 3년 만에 잡혔고, 잡힌 지 약 15일 만에 죽임을 당하였다.
임꺽정은 조정에서 그의 이름을 알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인 지 약 3년 만에 잡혔고, 잡힌 지 약 15일 만에 죽임을 당하였다.
3. 평가
실록의 사신(史臣)은 이렇게 평하였다.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하여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서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임꺽정은 이러한 정상을 이용하여 자기의 신분차별에 대한 한을 풀어보려고 하였
그가 죽고난 뒤 명화적(明火賊)은 그를 의적으로 떠받들었으며 무수한 설화를 낳게 하였고, 소설로 그의 행적을 그리기도 하였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그의 앞시대의 홍길동(洪吉童), 그의 뒷시대의 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도둑으로 들었다. 그리하여 일부는 살육을 자행하는 포악한 도둑으로 기록하기도 하고, 일부는 백성을 위하여 관곡을 털어 나누어주는 의적으로 평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寄齋雜記
星湖僿說
燃藜室記述
寄齋雜記
星湖僿說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이화(李離和)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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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