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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평(潘碩枰)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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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공문(公文)
호(號)송애(松厓)
시호(諡號)장절(壯節)
생년?(미상)
졸년1540(중종 35)
시대조선전기
본관광주(光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반서린(潘瑞麟)

[상세내용]

반석평(潘碩枰)
미상∼1540년(중종 3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공문(公文), 호는 송애(松厓). 반서린(潘瑞麟)의 아들이다.

어떤 재상의 종이었으나 재상이 그의 재주와 성품을 사랑하여 글을 가르치고 아들없는 부자집에 보내어 아들로 삼게 하고 공부에 힘쓰게 하였다.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 등과 교유하였다.

1507년(중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검열이 되고 경차관(敬差官)으로 함경도에 파견되어 여진의 동정을 보고하였으나 천얼출신이라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16년 안당(安塘)의 추천에 의하여 종5품으로서 경흥부사가 되고, 1522년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를 거쳐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1524년 군기를 살피지 않고 도로 사정의 보고를 잘못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다시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527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1530년에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531년 성절사(聖節使)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참판전라도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1533년 다시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미 한번 역임한 바 있고 또 문신이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반대가 있어 부임하지 못하였으나,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시종(侍從)을 역임하지 않았다 하여 공조참판으로 고쳐 임명되었다. 동지중추부사형조참판한성부판윤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이듬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뒤에 주인집 자손이 잔미(殘微)하여졌지만 혹 노상에서 만나면 반드시 예의를 차렸다 하며 청렴하고 겸공한 관리로 이름났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東儒師友錄補遺上
己卯錄補遺
安塘傳(安璐)
Commoners in Early Yi Dynasty Civil Examinations;An Aspect of Korean Social Structure
1392∼1600(Yong-ho Choe, Journal of Asian Studies 33―4, 1974)

[이미지]

[집필자]

김동수(金東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