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문(朴好問)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D638BB38D1453X0 |
시호(諡號) | 정무(貞武) |
생년 | ?(미상) |
졸년 | 1453(단종 1)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밀양(密陽)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상세내용]
박호문(朴好問)
미상∼1453년(단종 1).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밀양(密陽).
1419년(세종 1) 무과 회시에 장원 급제하고 1430년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이 되었다가 직첩을 삭탈당하였다.
1433년 직첩이 환급되고, 2월 전소윤으로서 호군 박원무(朴原茂)와 함께 함길도 변경에 출몰하는 야인 이만주(李滿住) 등의 실정과 파저강(婆猪江)일대의 산천‧도로‧촌락의 대소를 정찰하고 돌아와 평안도절제사 최윤덕(崔潤德)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파저강일대의 여진을 정벌하였다.
6월에는 봉상시윤(奉常寺尹)이 되었으며 8월에 대호군을 지냈다.
1434년에는 상호군으로서 겸사복윤(兼司僕尹)이 되었다.
1436년 판회령도호부사(判會寧都護府使)가 되어 야인의 변경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1440년 회령절제사였을 때 야인과 교결하여 형제를 칭하고 군신간을 이간시키고 여진의 세력이 커지자 병을 칭하고 군무를 태만한 죄로 8월 장(杖) 100에 처해지고, 여연(閭延)으로 유배되었다.
1447년 삭주절제사(朔州節制使)로 발탁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공조참판, 다음해 진하사(進賀使)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단종 즉위) 평안좌도도절제사, 다음해 평안우도도절제사가 되었다. 이어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首陽大君: 뒤의 세조)에 의하여 김종서(金宗瑞)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파면된 이징옥(李澄玉)의 뒤를 이어 함길도도절제사가 되었으나 이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이징옥에게 살해되었다.
1454년 정월, 의정부우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1419년(세종 1) 무과 회시에 장원 급제하고 1430년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이 되었다가 직첩을 삭탈당하였다.
1433년 직첩이 환급되고, 2월 전소윤으로서 호군 박원무(朴原茂)와 함께 함길도 변경에 출몰하는 야인 이만주(李滿住) 등의 실정과 파저강(婆猪江)일대의 산천‧도로‧촌락의 대소를 정찰하고 돌아와 평안도절제사 최윤덕(崔潤德)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파저강일대의 여진을 정벌하였다.
6월에는 봉상시윤(奉常寺尹)이 되었으며 8월에 대호군을 지냈다.
1434년에는 상호군으로서 겸사복윤(兼司僕尹)이 되었다.
1436년 판회령도호부사(判會寧都護府使)가 되어 야인의 변경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1440년 회령절제사였을 때 야인과 교결하여 형제를 칭하고 군신간을 이간시키고 여진의 세력이 커지자 병을 칭하고 군무를 태만한 죄로 8월 장(杖) 100에 처해지고, 여연(閭延)으로 유배되었다.
1447년 삭주절제사(朔州節制使)로 발탁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공조참판, 다음해 진하사(進賀使)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단종 즉위) 평안좌도도절제사, 다음해 평안우도도절제사가 되었다. 이어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首陽大君: 뒤의 세조)에 의하여 김종서(金宗瑞)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파면된 이징옥(李澄玉)의 뒤를 이어 함길도도절제사가 되었으나 이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이징옥에게 살해되었다.
1454년 정월, 의정부우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집필자]
박천식(朴天植)
명 : "호문(好問)"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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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