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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덕(崔潤德)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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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화(汝和)
자(字)백수(伯修)
호(號)임곡(霖谷)
시호(諡號)정렬(貞烈)
생년1376(우왕 2)
졸년1445(세종 27)
시대조선전기
본관통천(通川)
활동분야무신 > 무신
최운해(崔雲海)

[상세내용]

최윤덕(崔潤德)
1376년(우왕 2)∼1445년(세종 27).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여화(汝和)백수(伯修), 호는 임곡(霖谷).

지중추부사 최운해(崔雲海)의 아들이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여의고 부친은 국경의 수비에 나가 있어 한마을에 사는 양수척(楊水尺)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어느날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쏘아죽였다.

그뒤 음관(蔭官)으로 기용되어 아버지를 따라 여러 번 전공을 세우고 부사직이 되었다.

1402년(태종 2)에 낭장이 되고, 곧 호군을 거쳐 이듬해 대호군이 되었다.

1406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가 되었다가 1410년 무과에 급제하여 상호군이 되고, 동북면조전병마사(東北面助戰兵馬使)가 되었다가 이듬해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에 올랐다.

1413년 경성등처절제사(鏡城等處節制使)가 되어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를 복속시켜서 야인들의 준동을 막았으며, 영길도도순문찰리사(永吉道都巡問察理使)우군총제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였다.

1419년(세종 1)에 의정부참찬으로 삼군도통사가 되어 체찰사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1421년에는 공조판서가 되어 정조사(正朝使)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었다.

1426년 좌군도총제부사, 1428년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1433년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인 이만주(李滿住)함길도 여연(閭延)에 침입하였을 때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어 이만주를 대파하였고, 이 공으로 우의정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적이 또 변방을 침입하자 평안도도안무찰리사(平安道都安撫察理使)로 나가 이를 진압하였으며, 돌아와서는 무관으로서 재상의 직에 있을 수 없다는 소를 올려 무관직에 전임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35년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영중추원사에 전임된 뒤 1445년에 궤장(几)을 하사받았다.

그는 성품이 자애롭고 근검하여서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묵은 땅에 농사를 지었고,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남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 그 호랑이를 잡아서 배를 갈라 남편의 뼈를 찾아 장사를 지내게 해 준 일도 있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통천상렬사(尙烈祠)안주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人物志
朝鮮名臣錄

[이미지]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명 : "윤덕(潤德)"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02述祖宗功德作定大業與民樂等樂○命藝文提學鄭麟趾等撰七政筭內外篇文獻備考夏四月遣崔潤德率諸將往征李滿住潤德等拜辭上引見敎曰御戎之道自古無策三代帝王來則撫之去則不追羈縻之而已然無籍未得詳知自漢以來史策可考漢高
紀年便攷v7之方麗朝登武科早稱名將入我 朝以貮相兼平安道都節制使判安州牧公務之暇治㕔後隙地種苽手自鋤之訟者不知是潤德鎮安州種柳数萬株于州治之南蔵州基而捍水灾人比之甘棠不敢伐世宗甲寅征建州凱還上欲親迎于慕華館黃喜䓁曰不
紀年便攷v7欲親迎于慕華館黃喜䓁曰不必親臨遣知申及集賢學士迎慰亦足爲一時之榮觀従之告廟頒赦酌酒賜之又命世子行酒命潤德起舞仍拜相至左又拜都鎮撫察理使出鎭西邉上御慶會楼親餞之賜書賜夜及到恩威并行毛麟衛都督李㪚滿答失里建州
國朝人物志v1獲財寶牛馬悉與士卒又作粥以賑飢民多全活人咸慕稱之入本朝官至知中樞府事諡襄莊大東韻玉子潤德武科右議政
國朝人物志v1父雲海鎭邊不還托養于同隣楊水尺家稍長膂力絶人挽強射堅一日牧山中有虎忽來遂一箭斃之水尺携潤德往謁其父于合浦鎭譽其能藝不已其父曰當試之及與較獵左右馳射發無不中其父笑曰兒手雖敏尙未識軌
國朝人物志v1傳其語以匹夫拔起一朝爲國家名將豈無奇絶卓異之徵乎世宗癸丑以中軍領兵二千餘人從元帥崔潤德討野人破之凱旋以功拜判中樞院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