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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金銚)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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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김빈(金鑌)
자(字)자화(子和)
호(號)졸재(拙齋)
시호(諡號)공간(恭簡)
생년?(미상)
졸년1455(세조 1)
시대조선전기
본관김해(金海)
활동분야문신 > 문신
공신호원종공신

[상세내용]

김조(金銚)
미상∼1455년(세조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초명은 김빈(金鑌), 자는 자화(子和), 호는 졸재(拙齋).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였고 특히 역산(曆算)에 정통하였다.

1411년(태종 11)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고, 1416년에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25년(세종 7) 인동현감 재직중에 집현전사찬에 발탁, 이후 교리직전부제학을 역임하면서 갑인자(甲寅字)의 주조와 간의대‧자격루의 제조에 참여하는 등 세종대의 과학발달에 기여하였다.

1441년 좌부승지가 되면서 조(銚)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1443년 우승지에 승진되었으나, 세종온양 행행(幸行)수행중에 충청도관찰사 이익박(李益朴)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건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그해 충청도관찰사로 파견, 이후 형조참의경상도관찰사한성부윤 등을 역임했다.

1447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듬해 병조참판에 발탁, 곧 병조정랑 이현로(李賢老)병조좌랑 윤배(尹培)가 향화인(向化人) 홍사을마(洪沙乙麽)를 자의로 사직(司直)에 제수시킨 사실이 탄로날 때에 병조의 일을 철저히 감독하지 못했다는 문책을 받고 의금부에 하옥되었다가 외방에 부처(付處), 곧 방면되었다.

또한, 같은해에 전일 병조참판 재직시에 신맹린(辛孟磷) 등을 내금위(內禁衛)에 충속시킨 사건으로 문책되면서, 다시 의금부에 하옥된 후 외방에 부처되었다.

1450년(세종 32) 방환(放還)되었고, 세종의 위독으로 인한 추은(推恩)으로 직첩을 환급받았다. 같은해 형조참판에 복직되었고, 이듬해 문종의 고명(誥命)을 내려준 것을 감사하는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같은해에 찬진된 『고려사절요』의 교열에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참여하였으며, 영릉비(英陵碑)의 음기(陰記)를 제진하였다.

1453년(단종 1) 호조참판이 되었고, 같은해 10월 계유정난이 성공된 뒤 예조판서로 승진되었고,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 『문종실록』의 찬수에 참여하였으며, 1455년 지중추원사로 옮겼다가 죽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1455년 원종공신 2등에 추록되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한충희(韓忠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