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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로(李賢老)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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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이선로(李善老)
생년?(미상)
졸년1453(단종 1)
시대조선전기
본관동성(東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광후(李光後)

[상세내용]

이현로(李賢老)
미상∼1453년(단종 1). 조선 초기의 문신. 초명은 선로(善老). 본관은 동성(東城). 이광후(李光後)의 아들이다.

1438년(세종 2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집현전교리를 거쳐, 1447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부교리 때, 왕의 즉위 시 관복(冠服)과 상복(喪服)의 관례에 대해 대신들과 함께 주자의 설을 따를 것을 주장하였고, ≪동국정운≫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1449년 환관 최읍(崔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매관(賣官)한 것이 탄로나 남평으로 유배되었다. 1451년(문종 1) 유배에서 풀려나 부사직승문원교리를 역임하였다.

일찍이 풍수지리설을 익혀 백악산(白嶽山)뒤에 궁궐을 짓지 않으면 정룡(正龍)이 쇠잔, 방룡(傍龍)이 일어날 것이라고 발설하였다가 조정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한편 그는 풍수지리설에도 뛰어나 세종대에는 왕궁의 명당을 유지하기 위해 도성 가운데를 둘러 동으로 흘러 영제교(永濟橋) 동남에서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들어가는 개천(開川:현재의 淸溪川)의 물을 맑게 하도록 건의하였다. 즉, 개천에 오물 투기를 금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집현전교리 어효첨(魚孝瞻) 등의 반대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남원으로 귀양가는 도중 정분(鄭苯)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慵齋叢話

[집필자]

권인혁(權仁赫)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