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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明宗){2}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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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이환(李峘)
자(字)대양(對陽)
시호(諡號)공헌(恭憲)
생년1534(중종 29)
졸년1567(명종 22)
시대조선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왕실 > 왕
인순왕후(仁順王后)
장경왕후(章敬王后)
문정왕후(文定王后)
처부심강(沈鋼)

[상세내용]

명종(明宗)
1534년(중종 29)∼1567년(명종 22). 조선 제13대왕. 재위 1546년∼1567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환(李峘), 자는 대양(對陽).

비는 인순왕후(仁順王后)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이다. 중종의 둘째아들이며 인종의 아우이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서 명종을 낳았는데,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당시에 12세였던 명종이 즉위하였다.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니,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이 득세하여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문정왕후명종을 낳자, 장경왕후의 동생인 윤임(尹任)김안로(金安老) 등과 함께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겼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실각하고 윤원형 등이 등용되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암투가 더욱 치열해졌으니,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원형 일파를 소윤(小尹)이라고 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한때 윤임이 득세하여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士林)의 명사를 많이 등용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곧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크게 변하였다.

윤원형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 중종의 여덟째아들)에게 왕위를 옮기려 한다고 무고하는 한편, 윤임인종이 죽을 당시에 계성군(桂成君: 성종의 셋째아들)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여, 이를 구실삼아 왕과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하여,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당류(黨流)인 사림을 유배시켰다.

이어서 1547년에는 또다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계기로 그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로써 외척 전횡의 시대가 전개되자, 명종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이량(李梁)을 등용하였으나 그 역시 작당하여 정치가 더욱 문란해지고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이러한 때를 틈타 양주의 백정(白丁) 임꺽정(林巨正)이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경기도일대를 횡행하였고, 밖으로는 삼포왜란(三浦倭亂) 이래 세견선(歲遣船)의 감소로 곤란을 받아온 왜인들이 1555년 배 60여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해왔다.

이들은 결국 이준경(李浚慶)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 등에 의하여 영암(靈巖)에서 격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비변사의 설치연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때 일단 설치되어 임시기구로서 존속되어오다가 1555년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기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명종 때는 문정왕후가 불교를 독실히 믿었기 때문에 불교의 교세가 일어났다. 문정왕후보우(普雨)를 신임하여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삼고, 1550년에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부활시키고 이듬해에는 승과(僧科)를 설치하였다.

보우는 뒤에 도대선사(都大禪師)가 되었지만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잇따른 배불상소(排佛上疏)와 유림들의 기세에 밀려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변협(邊協)에게 피살되었다. 윤원형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강음(江陰)에 안치되어 죽었다. 이에 즈음하여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563년에 13세로 죽고, 왕위는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 중종의 아홉째아들)의 셋째아들이 계승하였으니, 이가 곧 선조이다. 능은 강릉(康陵)이며, 시호는 공헌(恭憲)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燃藜室記述
朝鮮備邊司考(李載浩, 歷史學報 50‧51 合輯, 1971)

[집필자]

윤희면(尹熙勉)

묘호 : "명묘(明廟)"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09曰太極與陰陽互動則不成說話也太極陰陽不能互動則謂理氣爲互發者豈不謬哉此言雖聖人復起而不能易者也上同○明廟之喪當以十月葬而日官以爲不吉大臣與日官定議以九月卜葬乃第四月也生員李愈上疏譏其渴葬王大妃下敎曰凡吉凶
國朝編年v11不得安於朝庭其爲凶險不可忍言人臣立朝而事君唯當守正行義倘或染跡於權門發身於戚里則雖有重名他何足觀頃在明廟末年沈義謙以椒房至親廣布恩私一時名士多出其門迨聖上入承之初內而交通宮禁恣行兇臆外而援結時流務專權勢終
東國歷代總目v02巳冊朴氏爲妃潘城府院君應順之女卽懿仁王妃○庚午前贊成李滉卒○滉字景浩號退溪眞寶人中廟朝登第就仕尋還鄕明廟嘗使人畵其所居陶山精舍以觀及上卽位召致擢用滉撰進聖學十圖西銘考證上虛心嘉納命皆繕寫爲屛置諸左右朝夕觀
歷代帝王紀年v01呂驪州人遷慶州二十三中生員二十四登第位至右贊成公天姿近道以繼往開來爲己任乙巳禍謫江界以疾終年六十三配明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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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