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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원(朴謹元)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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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일초(一初)
호(號)망일재(望日齋)
생년1525(중종 20)
졸년1585(선조 18)
시대조선전기
본관밀양(密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빈(朴薲)
조부박광영(朴光榮)

[상세내용]

박근원(朴謹元)
1525년(중종 20)∼1585년(선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일초(一初), 호는 망일재(望日齋). 참판 박광영(朴光榮)의 손자로, 박빈(朴薲)의 아들이다.

1546년(명종 1) 진사시에 합격, 155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교가 되었으나 1554년 친병으로 인하여 사직하였다.

이듬해 예조좌랑이 되었다가 1558년 사간원정언으로 옮겼고, 곧 시강원사서가 되었다.

이듬해 사헌부지평을 거쳐 홍문관수찬이 되었고, 이듬해 홍문관부교리에 승진하였다. 곧 이어 홍문관교리를 지내고 이조좌랑이 되었다.

1560년 홍문관부응교가 되었으나 이듬해 임백령(林百齡)의 시호사건(諡號事件)에 연루되어 파출(罷出)되었다.

1562년 다시 의정부검상사인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옮겼고, 이듬해 홍문관부제학 윤의중(尹毅中)과 함께 재앙이 생기는 데 대한 대책을 상소하였다. 이어서 집의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를 지냈다.

1564년 호조참의승정원좌승지가 되었다.

1566년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이듬해 대사간병조참지를 지냈다.

1569년(선조 2) 천추사(千秋使)명나라에 다녀왔다.

1572년 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을 지내고 예조참판대사헌을 번갈아 지냈으며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다.

1576년 경기감사를 지내고 1583년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동서분당으로 한창 논쟁이 심할 때 동인의 중진으로 송응개(宋應漑)허봉(許篈) 등과 함께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

그뒤 1585년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상소로 풀려났다.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권신(權臣)인 윤원형(尹元衡)의 악행을 직서하였으며, 처결수완이 뛰어나 대사헌을 여덟번이나 지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