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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건(吳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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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강(子强)
호(號)덕계(德溪)
생년1521(중종 16)
졸년1574(선조 7)
시대조선전기
본관함양(咸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오세기(吳世紀)
저서『덕계문집』
저서『정묘일기(丁卯日記)』

[상세내용]

오건(吳健)
1521년(중종 16)∼1574년(선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子强), 호는 덕계(德溪).

부친은 오세기(吳世紀)이다.

11세에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효성으로 소문이 났으며, 모친상을 당해서는 더욱 예의에 힘써 1549년(명종 4)에 예조로부터 포상을 받고, 왕으로부터 복호(復戶: 조세나 역을 면제해주는 것)를 받았다.

14세 때부터 경(經)‧자(子)‧사(史)에 몰두하였으나 집이 가난하여 선생을 모실 수 없었으므로 홀로 『중용』을 수백번 반복 연마하여 통달하고 『대학』『논어』『맹자』 등도 연구하였다.

조식(曺植)덕산동(德山洞)에서 강론하자 문인으로 수학하였으며, 김인후(金麟厚)이황(李滉)의 문인이기도 하다. 이황도 그의 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함을 칭찬하였다.

155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58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7년 승정원주서가 된 뒤 이듬해 정언헌납지평교리직강사성호조예조병조공조좌랑, 검상(檢詳)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571년(선조 4)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경연(經筵)에서 학문의 길은 궁리(窮理)와 거경(居敬)에 있다고 논한 바 있고, 소를 올려 학문을 진흥시킬 것과 간쟁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분위기가 직언을 싫어하고 사류(士類)들을 외면하는 경향이 강하자 1572년 이조정랑으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경상도 산음 덕계리(德溪里)로 낙향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에서의 부름이 있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서사(書史)를 섭렵하면서 시작(詩作)과 강론으로 여생을 마쳤다. 문인들이 덕계선생(德溪先生)이라 불렀으며, 산청(山淸)서계서원(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덕계문집』『정묘일기(丁卯日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嶺南人物考
德溪先生文集
東儒師友錄

[집필자]

정중환(丁仲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