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응정(梁應鼎)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591C751C815B1519X0 |
자(字) | 공섭(公燮) |
호(號) | 송천(松川) |
생년 | 1519(중종 14) |
졸년 | 1581(선조 14)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제주(濟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양팽손(梁彭孫) |
[관련정보]
[상세내용]
양응정(梁應鼎)
1519년(중종 14)∼1581년(선조 1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공섭(公燮), 호는 송천(松川). 교리 양팽손(梁彭孫)의 아들이며, 동래부사 양응태(梁應台)의 아우이다.
1540년(중종 35)에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고, 1552년(명종 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공조좌랑으로 1556년 중시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그 이듬해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당시 권신이었던 윤원형(尹元衡)에 의하여 김홍도(金弘度)와 함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가 1560년에 다시 복직되었다.
그뒤 수찬‧진주목사를 거쳐 1574년(선조 7) 경주부윤으로 재직중 진주목사로 있을 당시 청렴하지 못하였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578년에 공조참판으로 기용,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으나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대사성에 복직되었다.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송천집』‧『용성창수록(龍城唱酬錄)』이 있다.
1540년(중종 35)에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고, 1552년(명종 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공조좌랑으로 1556년 중시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그 이듬해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당시 권신이었던 윤원형(尹元衡)에 의하여 김홍도(金弘度)와 함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가 1560년에 다시 복직되었다.
그뒤 수찬‧진주목사를 거쳐 1574년(선조 7) 경주부윤으로 재직중 진주목사로 있을 당시 청렴하지 못하였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578년에 공조참판으로 기용,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으나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대사성에 복직되었다.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송천집』‧『용성창수록(龍城唱酬錄)』이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宣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공원영(孔黿泳)
명 : "응정(應鼎)"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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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