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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朴誾)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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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열(仲說)
호(號)읍취헌(挹翠軒)
생년1479(성종 10)
졸년1504(연산군 10)
시대조선전기
본관고령(高靈)
활동분야학자 > 유생
박담손(朴聃孫)
외조부이이(李苡)
출신지경상북도 고령

[상세내용]

박은(朴誾)
1479년(성종 10)∼1504년(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학자‧시인.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 경상북도 고령 출신.

한성부판관 박담손(朴聃孫)의 아들이며, 모친은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 이이(李苡)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범상하지 않았으며, 정신과 골격이 맑고 눈썹과 눈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속세에 사는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4세에 독서할 줄 알았으며, 8세에 대의를 알았다.

15세에 이르러서는 문장에 능통하였으며, 당시 대제학이었던 신용개(申用漑)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다.

1495년 17세로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같은해 사가독서자(賜暇讀書者) 선발에 뽑혔다.

그뒤 곧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를 받고 홍문관에 선택되어 정자가 되고, 수찬에 있으면서 경연관을 지냈다.

1498년 20세의 약관으로 유자광(柳子光)의 간사함과 성준(成俊)유자광에게 아첨함을 탄하는 소를 올려 오히려 그들의 모함을 받았다. 평소 직언을 꺼린 연산군은 ‘사사부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파직시켰다.

1501년 23세에 파직되어 옥에 갇힘으로써 생활은 불우한 쪽으로 기울어져갔다. 파직으로 인해 경제적‧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하게 되자, 이때부터 스스로 세속 사람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자연에 묻혀 밤낮으로 술과 시로써 세월을 보냈다.

1503년에 어려운 가정을 힘겹게 꾸려나간 아내 신씨가 25세로 죽고, 그 이듬해에 다시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갈 뜻이 없었다. 갑자사화 때 동래로 유배,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어 사형을 당하니 그의 나이 26세였다.

3년 뒤 신원되고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대표적 시인이며, 절친한 친구인 이행(李荇)이 그의 시를 모아 『읍취헌유고』를 냈다.

그의 시는 주로 파직된 23세부터 아내가 죽기 전까지의 것이며,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온갖 고뇌로부터 정신적으로 평화로울 수 있는 현실초극에의 노력과 주변인물의 죽음을 통한 인생무상을 노래하였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晴窓軟談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朴誾 漢詩의 特色(洪瑀欽, 韓國語文論集 1, 韓國社會事業大學, 1981)
挹翠軒 朴誾硏究(洪順錫, 國文學論集 11, 단국대학교, 1983)

[집필자]

고경식(高敬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