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준(成俊)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131C900FFFFB1436X0 |
자(字) | 시좌(時佐) |
시호(諡號) | 명숙(明肅) |
생년 | 1436(세종 18) |
졸년 | 1504(연산군 10)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창녕(昌寧)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성순조(成順祖) |
[상세내용]
성준(成俊)
1436년(세종 18)∼1504년(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시좌(時佐). 참판 성순조(成順祖)의 아들이다.
1456년(세조 2) 사마시에 합격, 14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469년(예종 1)필선‧사섬시첨정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1479년(성종 10)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481년 이조참의‧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다음해 우승지‧형조참판‧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485년 장령, 이듬해 영안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1488년 대사헌‧이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고, 1490년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영안도절도사로 나아가 북정부원수(北征副元帥)로서 도내에 쳐들어온 야인을 정벌하였다.
1495년(연산군 1) 병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고, 1498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삼수군(三水郡)에 야인들이 침범하자 서정장수(西征將帥)가 되고, 1500년 좌의정에 올라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우의정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시폐십조를 주청,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연산군을 경계시키기 위하여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열독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1503년 영의정에 올라 세자사(世子師)를 겸하였으나 갑자사화 때 앞서 성종비 윤씨(尹氏)의 폐위와 사사에 관여한 죄로 직산에 유배, 이어 배소에서 잡혀와 교살되었다. 중종 때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명숙(明肅)이다.
1456년(세조 2) 사마시에 합격, 14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469년(예종 1)필선‧사섬시첨정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1479년(성종 10)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481년 이조참의‧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다음해 우승지‧형조참판‧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485년 장령, 이듬해 영안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1488년 대사헌‧이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고, 1490년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영안도절도사로 나아가 북정부원수(北征副元帥)로서 도내에 쳐들어온 야인을 정벌하였다.
1495년(연산군 1) 병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고, 1498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삼수군(三水郡)에 야인들이 침범하자 서정장수(西征將帥)가 되고, 1500년 좌의정에 올라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우의정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시폐십조를 주청,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연산군을 경계시키기 위하여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열독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1503년 영의정에 올라 세자사(世子師)를 겸하였으나 갑자사화 때 앞서 성종비 윤씨(尹氏)의 폐위와 사사에 관여한 죄로 직산에 유배, 이어 배소에서 잡혀와 교살되었다. 중종 때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명숙(明肅)이다.
[참고문헌]
睿宗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이현희(李炫熙)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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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