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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령(金千齡)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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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인로(仁老)
생년1469(예종 1)
졸년1503(연산군 9)
시대조선전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치세(金致世)
조부김종순(金從舜)

[상세내용]

김천령(金千齡)
1469년(예종 1)∼1503년(연산군 9). 조선 성종 때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인로(仁老). 판윤(判尹) 김종순(金從舜)의 손자이고, 통판(通判) 김치세(金致世)의 아들이다.

1489년(성종 20)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496년(연산군 2) 식년문과에 장원하였다. 성균관전적이조좌랑을 거쳐, 1498년에는 사가독서하였다. 이어 홍문관에 들어가 부응교에 올랐다.

학문이 뛰어나고 언동이 강직하며, 정사에 민활하여 촉망을 받았다.

1502년 승문원교감(承文院校勘)으로 성절사(聖節使)를 수행하여 명나라에 다녀온 뒤,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듬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외유내강하며, 강직한 언사 때문에 재상의 비위를 거슬려 중죄를 입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사를 발표할 때는 반드시 경전에 근거하여 명백하고 조리있게 논평하여 임금의 뜻을 크게 움직였다.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청빈한 대간으로 칭송을 받았으나, 1503년 35세로 요절하였다.

죽은 이듬해의 갑자사화 때, 앞서 대간으로 재직하면서 정침(鄭沈)의 가자(加資)를 주장한 일로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추형을 당하였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홍순창(洪淳昶)
대표명김천령(金千齡)
천령(千齡)
성명김천령(金千㱓), 김천령(金千齡)
인로(仁老)

명 : "천령(千齡)"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10雲收天際孤輪月乃祖未及對千齡曰何不曰風定江心一葉舟癸亥卒年三十五燕山嘗求中原西苽千齡大言止之甲子傳曰千齡雖已死當䖏斬於是禍及泉壤其子决杖逐外後贈千齡都承旨孫命元䖏元見下
紀年便攷v10抱在乃祖膝上客得句曰雲收天際孤輪月乃祖未及對千齡曰何不曰風定江心一葉舟癸亥卒年三十五燕山嘗求中原西苽千齡大言止之甲子傳曰千齡雖已死當䖏斬於是禍及泉壤其子决杖逐外後贈千齡都承旨孫命元䖏元見下
紀年便攷v10一葉舟癸亥卒年三十五燕山嘗求中原西苽千齡大言止之甲子傳曰千齡雖已死當䖏斬於是禍及泉壤其子决杖逐外後贈千齡都承旨孫命元䖏元見下
寒臯觀外史v11千齡字仁老慶州人官直學
寒臯觀外史v11金直學千齡為己酉進士壯元試三都賦居首信佳作但叙髙勾驪國系云朱蒙啓其赫業東明承其祖武云云朱蒙為高勾驪始祖在位十九
國朝捷錄v01字應順號酒隱慶州人平亂功臣壬辰起復爲都元帥辛丑拜領忠翼公國舅柱臣曾祖大憲萬勻子 明宗朝科万勻父千齡万勻子慶元三代文魁
國朝人物志v2字仲任慶州人直提學千齡子出繼持平引齡之後進士文科官至大司憲國朝榜目
國朝人物志v2字應順號酒隱慶州人戊午生員辛酉文科大司憲萬鈞子直提學千齡孫癸未爲全羅監司辭職因薦全州府尹沈義謙智慮長遠曾爲本道監司熟知弊瘼請移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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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