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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사(金謹思)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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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명통(明通)
생년1466(세조 12)
졸년1539(중종 34)
시대조선전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면(金勉)

[상세내용]

김근사(金謹思)
1466년(세조 12)∼1539년(중종 3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명통(明通). 부사 김면(金勉)의 아들이다.

1486년(성종 17)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03년(연산군 9)에 사헌부장령을 지낸 뒤 다음해 홍귀달(洪貴達)의 유배사건에 연루되어 서천에 유배되었다가 곧 방환되었다.

1509년(중종 4) 경차관(敬差官)으로 경상도 삼포(三浦)의 왜인들을 추고(推考), 단속하였고, 1512년 우부승지좌승지를 거쳐 1515년 홍문관부제학,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1517년 판결사(判決事)충청도관찰사병조참의를 지내고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김안로(金安老)의 일파 승지가 되었다.

이후 이조참판형조참판을 거쳐 1525년 동지돈녕부사로 있으면서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고, 다음해 황해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한성부우윤대사헌공조참판한성판윤을 지냈다.

1531년 병조판서이조판서판의금부사를 지냈다.

1533년 우의정이 되고 다시 좌의정 겸 세자사부가 되었으며, 153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37년에 대간으로부터 김안로의 일파로 탄핵을 받고 김안로가 실각되면서 파직당하여, 하동(河東)으로 유배되었다가 1539년에 배소에서 죽었다. 관직은 매우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하였으나, 김안로와 정치적인 운명을 함께 하였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김동수(金東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