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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영(朴光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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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군실(君宲)
생년1463(세조 9)
졸년1537(중종 32)
시대조선전기
본관밀양(密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미(朴楣)

[상세내용]

박광영(朴光榮)
1463년(세조 9)∼1537년(중종 3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군실(君宲). 예조참의 박미(朴楣)의 아들이다.

1486년(성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보임되고, 곧이어 홍문관박사봉상시주부홍문관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504년 정언으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廢妃尹氏)추숭(追崇)을 반대하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목천(木川)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서, 정언으로 복직되고 이듬해 지평으로 승진, 이어 사인(舍人)응교집의를 거쳐 통례원좌통례 등을 역임하였다.

1515년(중종 10) 동부승지가 되었고 또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었다. 이어 대사간을 지내고 병조참의가 되었다.

1518년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고, 뒤이어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뒤에 황해도관찰사로 나갔으나 도둑을 토벌하지 못한 죄로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어 강릉부사로 임용되었고, 만기가 되자 이조참의가 되었다.

1528년 좌승지를 거쳐 한성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맏형이 아들이 없어 뒤를 잇지 못하므로 그가 습작(襲爵)을 받아 밀성군(密城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1532년 공조참판부총관을 겸하고 뒤에 형조참판이 되었다.

직언으로 대신들의 미움을 샀고 생원으로 있을 때 나라에서 배척하는 불교를 숭봉하였다는 죄목으로 장류(杖流)되기도 하였으며, 폐비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유배되는 등 많은 파란을 겪었다.

외교에도 상당한 수완을 가지고 있어 중국을 세번이나 다녀왔고, 어려운 일들을 곧잘 처리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