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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호(申從濩)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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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차소(次韶)
호(號)삼괴당(三魁堂)
생년1456(세조 2)
졸년1497(연산군 3)
시대조선전기
본관고령(高靈)
활동분야문신 > 문신
신주(申澍)
조부신숙주(申叔舟)

[상세내용]

신종호(申從濩)
1456년(세조 2)∼1497년(연산군 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차소(次韶), 호는 삼괴당(三魁堂).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의 손자이며, 봉례랑(奉禮郞) 신주(申澍)의 아들이다.

1474년(성종 5) 약관으로 성균진사시에 장원을 하고, 1480년 식년문과에 다시 장원을 하였다. 그해 감찰에 임명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이듬해 천추사(千秋使) 홍귀달(洪貴達)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

그때 명나라 역관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료병(水潦病)에 걸려서 돌아오지 못하고 고생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명나라 예부(禮部)에 건의하여 그들을 치료하게 한 뒤, 모두 귀국시키는 데 힘써 이들을 귀환하게 하였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뒤 수찬교리를 역임하였으며, 1486년 부응교로 있을 때에 또다시 문과중시에 장원함으로써 과거제도가 생긴 이후 세번이나 장원을 한 것은 그가 처음이라 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해에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으로 초배(超拜)되었고, 『여지승람』을 정정하여 『동국여지승람』으로 다시 찬술해내는 데 참여하였다.

이듬해 그 공으로 왕으로부터 녹피(鹿皮)를 하사받았으며, 왕명으로 요동(遼東)에 가서 한어(漢語)를 습득하고 돌아왔다.

1488년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으며, 이듬해 동부승지가 된 뒤 예조참의좌승지우승지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491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북쪽 오랑캐 침입사건에 관한 어전회의가 있을 때에 영의정을 모욕한 죄로 파면되었으나, 얼마 뒤 다시 등용되어 도승지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병조예조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494년 경기도관찰사로 나아갔으며, 이듬해 중앙으로 들어와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있으면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6년(연산군 2) 병환을 무릅쓰고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인 1497년에 돌아오던 중에 개성에서 죽었다. 관후(寬厚)한 장자의 풍모를 지녔으며, 문장과 시‧글씨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삼괴당집』이 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