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손(張順孫)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A5C21CC190B1453X0 |
자(字) | 자활(子活) |
시호(諡號) | 문숙(文肅) |
생년 | 1453(단종 1) |
졸년 | 1534(중중 29)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인동(仁同[3])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장중지(張重智) |
출신지 | 성주(星州) |
[관련정보]
[상세내용]
장순손(張順孫)
1453년(단종 1)∼1534년(중중 2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인동(仁同[3]). 자는 사호(士浩) 또는 자활(子活). 성주(星州) 출신.
군수 장중지(張重智)의 아들이다.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한 뒤 정언‧회령판관을 역임하고, 1496년(연산군 2) 홍문관에 들어와 부응교‧응교를 지냈다.
1499년 사인(舍人)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홍문관의 직제학‧부제학, 승정원의 동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오르고 곧 전라도관찰사에 외보(外補)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원방에 부처(付處)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경상도관찰사에 보임되었으며, 이듬해 한성부좌윤이 되었고, 이어 대사헌으로 재직중 정국공신(靖國功臣)인 박영문(朴永文)의 불법을 탄핵하기도 하는 등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조참판‧형조판서‧우참찬을 거쳐 1509년(중종 4) 호조판서로서 경연특진관을 겸하여 폐지된 저화(楮貨)를 재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고, 좌참찬으로 군량확보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515년부터 호조판서‧병조판서를 역임하면서 노모의 연로함을 들어 계속 사직을 요청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사신(史臣)은 그의 탐오(貪汚)와 회뢰(賄賂)로 인하여 공론이 비등하자, 거짓으로 사직을 요청한 것으로 비난하고 있다.
그는 1518년 병조판서로 재직중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가 과거제의 폐단을 들어 현량과(賢良科)실시를 주장하자 그 의결에 반대하였다가 이듬해 김안로(金安老)의 일파로서 사림을 축출하려 하였다는 삼사의 탄핵으로 파면되었다.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축출되자, 복직되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한 뒤 다시 이조판서‧판의금부사를 거쳐 판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이때 나이 70으로 궤장(几杖)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어 권신 김안로가 정권을 장악하자, 그에 의하여 우의정에 오르고, 좌의정을 거쳐 1533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이듬해 죽었다.
사신은 그를 사람됨이 용렬하고 김안로에 당부(黨附)하여 재상이 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비루하게 여겼다고 평하고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군수 장중지(張重智)의 아들이다.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한 뒤 정언‧회령판관을 역임하고, 1496년(연산군 2) 홍문관에 들어와 부응교‧응교를 지냈다.
1499년 사인(舍人)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홍문관의 직제학‧부제학, 승정원의 동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오르고 곧 전라도관찰사에 외보(外補)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원방에 부처(付處)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경상도관찰사에 보임되었으며, 이듬해 한성부좌윤이 되었고, 이어 대사헌으로 재직중 정국공신(靖國功臣)인 박영문(朴永文)의 불법을 탄핵하기도 하는 등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조참판‧형조판서‧우참찬을 거쳐 1509년(중종 4) 호조판서로서 경연특진관을 겸하여 폐지된 저화(楮貨)를 재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고, 좌참찬으로 군량확보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515년부터 호조판서‧병조판서를 역임하면서 노모의 연로함을 들어 계속 사직을 요청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사신(史臣)은 그의 탐오(貪汚)와 회뢰(賄賂)로 인하여 공론이 비등하자, 거짓으로 사직을 요청한 것으로 비난하고 있다.
그는 1518년 병조판서로 재직중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가 과거제의 폐단을 들어 현량과(賢良科)실시를 주장하자 그 의결에 반대하였다가 이듬해 김안로(金安老)의 일파로서 사림을 축출하려 하였다는 삼사의 탄핵으로 파면되었다.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축출되자, 복직되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한 뒤 다시 이조판서‧판의금부사를 거쳐 판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이때 나이 70으로 궤장(几杖)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어 권신 김안로가 정권을 장악하자, 그에 의하여 우의정에 오르고, 좌의정을 거쳐 1533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이듬해 죽었다.
사신은 그를 사람됨이 용렬하고 김안로에 당부(黨附)하여 재상이 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비루하게 여겼다고 평하고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典故大方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典故大方
[집필자]
이병휴(李秉烋)
명 : "순손(順孫)"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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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