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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괄(鄭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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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회(慶會)
시호(諡號)공숙(恭肅)
생년1435(세종 17)
졸년1495(연산군 1)
시대조선전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창손(鄭昌孫)

[상세내용]

정괄(鄭佸)
1435년(세종 17)∼1495년(연산군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회(慶會).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아들이다.

1456년(세조 2) 생원시에 합격한 뒤 음보(蔭補)로 관도에 나가 주부공조좌랑정랑을 지냈다.

1465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사예를 거쳐 장령으로 성절사(聖節使)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73년(성종 4)에는 대사간에 올라 언로의 확충,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의 폐단 시정, 과거급제 정원의 증가, 관리 서용의 새 기준 마련 등 국정 전반에 걸친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병조의 참지‧참의를 역임하고 황해도관찰사로 승진, 잠시 외직에 있다가 다시 돌아와 한성부좌윤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이 된 지 수개월 만에 이조판서에 발탁되어 3년간 전형(銓衡)을 담당하였다.

그뒤 지중추부사한성부판윤병조판서우찬성도총관형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149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으며, 1492년 진하사(進賀使)명나라에 가서 황태자의 책봉을 축하하고 돌아와 다시 병조판서를 지냈다.

이듬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을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평안도는 중국사신의 경유지이므로 명망자(名望者)가 파견되어야 하는 곳이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우의정이 되었다가, 1495년에 좌의정으로 승보되었으며, 사은사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칠가령(七家嶺)에서 죽었다.

그는 맡은 일을 착실하게 수행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기상이 엄준하여 대신의 풍도가 있었다고 한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大東野乘
國朝人物考

[집필자]

이병휴(李秉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06-14『국조문과방목』을 참고하여 정괄(鄭适)에서 정괄(鄭佸)로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