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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약동(李約東)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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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춘보(春甫)
호(號)노촌(老村)
시호(諡號)평정(平靖)
생년1416(태종 16)
졸년1493(성종 24)
시대조선전기
본관벽진(碧珍)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덕손(李德孫)
저서『노촌실기』

[상세내용]

이약동(李約東)
1416년(태종 16)∼1493년(성종 2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 호조판서에 증직된 이덕손(李德孫)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조위(曺偉) 등과 교분이 깊었다.

1441년(세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뒤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을 거쳐 1454년(단종 2) 감찰황간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458년(세조 4) 지평이 되고, 이듬해 사직하였다가 1464년 선전관으로 복직하였다.

1466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고 구성부사 등을 역임하다가 1468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1470년(성종 1) 제주목사가 되어 재직할 때 관아 이속들의 부정과 민폐를 단속, 근절시키고 공물의 수량을 감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또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관물(官物)인 말채찍을 손에 들고 온 것을 알고 성루 위에 걸어놓고 왔으며, 항해중 배가 파선의 위기에 이르자 하늘을 속인 노여움이라 단정하고 배 안을 살펴 몰래 부하들이 넣어둔 갑옷을 찾아내어 강물에 던진 투갑연(投甲淵)일화는 유명하다.

1474년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千秋使)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호조참판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487년 한성부좌윤이조참판 등을 거쳐, 1489년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다가 1491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하였다. 금산경렴서원(景濂書院), 제주도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고, 성종 때 청백리로 뽑히고 기영록(耆英錄)에 올랐다.

저서로는 『노촌실기』가 있다.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김성준(金成俊)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