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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金宗瑞)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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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국경(國卿)
호(號)절재(節齋)
시호(諡號)충익(忠翼)
생년1382(우왕 8)
졸년1453(단종 1)
시대조선전기
본관순천(順天)
활동분야정치 > 정치가
김수(金陲)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종서(金宗瑞)
1382년(우왕 8)∼1453년(단종 1). 조선 초기의 정치가.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도총제(都摠制) 김수(金陲)의 아들이다. 형은 김종흥(金宗興)이다.
1. 공적과 관력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1415년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을 지냈고, 1418년(세종 즉위) 11월 감찰로서 강원도의 답험손실(踏驗損實)로 원성이 크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다시 조사하게 하였다.

1419년 3월 행대감찰(行臺監察)로서 충청도에 파견되어 진휼상황을 조사하였고, 같은해 10월에 사간원우정언이 되었다.

1420년 윤정월에 광주판관(廣州判官)이 되었고, 봉상판관(奉常判官)으로 있으면서 의주(義州)삭주도(朔州道)진제경차관(賑濟敬差官)으로 파견되었으며, 1426년 4월에는 이조정랑으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침입한 왜인의 포획상황을 조사, 보고하였다.

1427년에는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황해도 경차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특히,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1433년 좌대언인 그에게 이부지선(吏部之選)을 관장하도록 특명하기도 하였다.

같은해 12월 함길도도관찰사가 된 뒤 7, 8년간 북변에서 육진(六鎭)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1445년에는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삼남지방의 목마장으로 적합한 곳과 방마(放馬)가 가능한 곳의 수효를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446년 의정부우찬성으로 임명되고 판예조사(判禮曹事)를 겸하였으며, 이듬해 충청도에 파견되어 태안 등지의 책보(栅堡)를 심정하였다.

1449년 8월 달달(達達, Tatar) 야선(也先)이 침입하여 요동 지방이 소란해짐에 그에 대처하기 위하여 평안도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에 소환되었다.

1451년(문종 1) 좌찬성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 『고려사』를 찬진하였고, 같은해 10월 우의정이 되었다.

1452년 『세종실록』 편찬의 감수를 맡았고 『고려사절요』를 찬진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다가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2. 면모
그는 육진개척의 수장으로서,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로서, 『고려사』『고려사절요』의 편찬책임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아버지가 무관직에 있었고 육진개척에서 이룩한 공로로 해서 그를 흔히 무장으로 알기 쉬우나, 강직‧엄정하고 밝은 문인‧학자였으며, 유능한 관료이기도 하였다.

강직‧엄정한 면모는 사헌부사간원의 이력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육진개척의 일을 마친 뒤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1446년에 우찬성으로서 판예조사를 겸한 일 등은 그가 고제(古制)와 의례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관료로서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자, 그의 위세는 범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한 위세는 단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심하여져 ‘그의 전횡과 독단이 너무 심하다’라는 명나라 사신의 평을 받기도 하였다.
3. 실록편찬과 수난
세종권제(權踶)안지(安止) 등의 『고려사』 개수작업이 미비한 것을 보고 1449년 김종서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고쳐 쓰기를 명하였다.

그 작업은 2년 뒤에 완성되었는데, 이때 집필과 교열을 맡은 이들은 김종서 외에는 모두 집현전의 관료출신들이었다. 집현전출신이 아니면서도 당시 최고수준의 학자‧관료였던 집현전학사와 그 출신들을 지휘하여 『고려사』 편찬의 책임을 맡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학자적 능력을 보여주는 면이라 할 수 있다.

1451년 새로 편찬된 『고려사』를 왕에게 올리는 자리에서 편년체의 『고려사』 편찬을 건의하자, 왕은 즉시 그 편찬의 착수를 명하여 이듬해에 『고려사절요』가 이루어졌다.

같은해 『세종실록』의 편찬 때에는 책임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세종실록에는 따로 지(志)를 만들어야 마땅하다.”고 한 정인지의 의견을 지지하여 『세종실록』에 오례‧악보‧지리지‧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등의 전문적인 자료가 정리되어 실리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단종이 즉위한 뒤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아래서의 의정부 대신들의 권한은 왕권을 압도할 정도였다.

특히, 학문과 지략에 무인적 기상을 갖춘 위세는 당시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듣기에 족하였다. 수양대군이 야망을 실현하는 데 가장 문제되는 인물로 지목되었고, 결국 계유정난 때에 제거되었다.

그뒤 1678년(숙종 4)에 그 후손들이 채용되었고, 1746년(영조 22)에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文宗實錄
世祖實錄
增補文獻備考
海東名臣傳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韓國滿洲關係史의 硏究(李仁榮, 乙酉文化社, 1954)
高麗史節要解題(金庠基, 高麗史節要, 古典刊行會刊, 1960)
高麗史編纂始末(申奭鎬, 韓國史料解說集, 韓國史學會, 1964)
세종대왕(홍이섭,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1)
高麗史解題(李基白, 高麗史, 景仁文化社, 1972)
金宗瑞(李鉉淙, 韓國의 人間像 2, 新丘文化社, 1973)
東北西北界의 收復(宋炳基,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74)

[집필자]

최승희(崔承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3-09문과방목을 참고하여 부명을 김추(金錘)에서 김수(金陲)로 수정함.
2011-03-11조선왕조실록[1451년(문종 1) 11월 28일(임술)條]에 나오는 "右議政金宗瑞, 以明年滿七十不仕, 命令出仕。"를 참고하여 생년을 계해(癸亥, 1383)로 수정함. 그밖에 기년편고에는 경오(庚午, 1390)로, 국립중앙도서관본 문과방목에는 신미(辛未, 1391)로 적혀있음.
2011-04-19청선고 [台司]에 경오(庚午, 1390)생으로, [二十前登科入閣]에 "김종서 16세"라고 기록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