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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崔忠獻)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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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최난(崔鸞)
시호(諡號)경성(景成)
생년1149(의종 3)
졸년1219(고종 6)
시대고려중기
본관우봉(牛峰)
활동분야무신 > 무신
최원호(崔元浩)
임씨(任氏)
왕씨(王氏)
공신호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
공신호정국공신(靖國功臣)
공신호영렬우성공신(英烈佑聖功臣)
공신호특진우모일덕안사제세공신 문하시중 진강군개국후(特進訏謀逸德安社濟世功臣門下侍中晉康郡開國侯)
공신호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文經武緯嚮里措安功臣)

[상세내용]

최충헌(崔忠獻)
1149년(의종 3)∼1219년(고종 6). 고려 무신정권기의 집권자. 본관은 우봉(牛峰). 초명은 난(鸞). 상장군 최원호(崔元浩)의 아들이다.
1. 가계 및 입신
음보(蔭補)로 양온령(良醞令)이 되었으나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난 때 원수 기탁성(奇卓誠)의 휘하에서 용감히 싸워 별초도령(別抄都令)이 되었으며, 뒤이어 섭장군(攝將軍)이 되었다.
2. 집권 명분
1196년에 아우 최충수(崔忠粹), 생질 박진재(朴晉材) 등과 함께 미타산(彌陀山)별장에서 이의민(李義旼)을 제거하는 한편, 그 일당과 그 여당으로 지목되는 문무관(文武官)을 대량 학살 또는 귀양보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이의민을 제거하고 나서 왕에게 아뢰기를 “적신(賊臣)이의민이 일찍 시역(弑逆)의 죄(의종을 경주에서 살해한 죄)를 범하고 생민(生民)을 포학하게 침해하며 대보(大寶: 王位)를 엿보므로 신(臣) 등이 미워한 지가 오래였습니다. 이제 국가를 위하여 토벌하였으나 다만 일이 누설될까 두려워서 감히 명을 청하지 못하였으니 죽을 죄입니다.”라고 하여 이의민 제거를 정당화하려 하였다.

그는 집권하고 나서 아우 최충수와 함께 그동안 누적되었던 폐정(弊政)의 개혁을 요구하는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올려 집권의 명분을 삼으려 하였다.
3. 봉사십조
그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① 구기(拘忌)의 설을 믿고 새로 짓고 사용하지 않는 궁궐에 입어(入御)할 것, ② 용관(冗官)을 도태할 것, ③ 대토지 소유자가 겸병(兼倂)한 공사전(公私田)을 문적(文籍)에 비추어 환원할 것, ④ 공사(公私) 조부(租賦)의 공정을 기하고 권세가의 민산(民産)침해를 금할 것, ⑤ 왕가의 제도(諸道) 공진(供進)을 금할 것, ⑥ 승려의 왕궁출입과 왕실의 민간에 대한 고리대업을 금할 것, ⑦ 염직(廉直)한 주‧군리(州郡吏)를 채용할 것, ⑧ 조신(朝臣)들의 사치생활을 금할 것, ⑨ 비보사찰(裨補寺刹)이외의 것을 삭거(削去)할 것, ⑩ 성대(省臺)의 기능을 바로잡을 것 등이다.
4. 최씨 독제정권의 확립
그리고 그는 왕의 측근자 50인을 추방하고 좌우승선(左右承宣)을 거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그 이듬해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에 봉하여지고, 그 아버지 최원호에게는 봉의찬덕공신 수태위 문하시랑(奉議贊德功臣守太尉門下侍郞)이 증직되었다.

또, 그해 9월에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국고를 낭비하자 왕을 창락궁(昌樂宮)에 유폐한 뒤 왕의 아우 평량공(平凉公) 민(旼)을 맞아 왕(神宗)을 삼았으며, 그는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삼한대광대중대부 상장군 주국(三韓大匡大中大夫上將軍柱國)이 되고, 그 아버지에게는 영렬우성공신(英烈佑聖功臣)에 삼중대광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이 증직되었는데, 이것으로 최씨 독재정권이 확립되었다.
5. 아우살해‧인사권 장악
이때 아우 최충수가 자기의 딸을 태자(太子: 뒤의 희종)의 비(妃)로 삼으려 하자 이를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을 치려 하므로, 박진재노석숭(盧碩崇) 등과 함께 무리 1,000여로 흥국사(興國寺) 남쪽에서 그 무리와 싸워 패배시키고, 최충수파평현(坡平縣) 금강사(金剛寺)에서 피살되었다.

그해 추밀원지주사 지어사대사(樞密院知奏事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198년(신종 1)에 만적(萬積)의 난을 평정하고, 그 이듬해 병부상서 지이부사(兵部尙書知吏部事)가 되어 문무관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그해 황주목사(黃州牧使) 김준거(金俊琚) 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義同三司)가 되었으며, 이듬해 삼중대광 수태위 상주국(三重大匡守太尉上柱國)이 되었다.

이때 도방(都房)을 설치하여 문무관과 한량‧군졸 중에서 강용(强勇)한 자를 선발하여 6번(番)으로 나누어 교대로 자기의 집에 숙식시켜 신변을 보호하게 하였으며, 그가 외부에 출입할 때는 6번을 합쳐 지키게 하였다.

1201년에 추밀원사(樞密院使)이병부상서(吏兵部尙書)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6. 희종 옹립‧국정장악
이듬해 비로소 사제(私第)에 있으면서 문무관의 전주(銓注: 인사행정)를 행하였는데, 이때 그것을 왕에게 아뢰면 왕은 머리만 끄떡일 뿐이고 전주를 맡은 이부병부판사(判事)는 정당(政堂)에 앉아 다만 검열만 할 뿐이었다.

그해 수태부참지정사 판어사대사(守太傅參知政事判御史臺事)가 되었다.

1203년에 중서시랑평장사 이부상서 태자소사(中書侍郞平章事吏部尙書太子少師)가 되었으며, 이듬해 신종을 폐하고 태자(희종)를 옹립하여 그는 벽상삼한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상주국 판병부어사대사 태자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上柱國判兵部御 史臺事太子太師)가 되고, 왕이 그를 특수한 예로써 대우하고 항상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불렀다.

1205년(희종 1)에 내장전(內庄田) 100결(結)을 하사받고 특진우모일덕안사제세공신 문하시중 진강군개국후(特進訏謀逸德安社濟世功臣門下侍中晉康郡開國侯)에 봉해졌다.

이듬해 진강후(晉康侯)가 되고 부(府)라 하였는데, 이때부터 궁궐을 출입함에 있어서 편복(便服)으로 일산(日傘)을 받들고 시종하는 문객(門客)이 3,000여인이나 되었다.

1207년에 많은 문객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불만을 품어오던 생질 박진재백령진(白翎鎭)으로 귀양보내는 한편, 이규보(李奎報)를 등용하여 무신정권으로 쇠퇴하였던 문운(文運)의 진흥을 꾀하였다.

1209년에 청교역(靑郊驛)의 이(吏) 3인이 자기 부자(父子)를 살해하려는 사건이 생기자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영은관(迎恩館)에 설치하고 그 일당을 숙청하였는데, 이 교정도감은 그뒤에도 존속되면서 인사‧감찰‧징세(徵稅) 등 국정 전반을 장악하는 최씨 정권의 최고기관이 되었으며, 그는 스스로 그 장(長)인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었다.

1211년에 내시낭중 왕준명(王濬明) 등의 계책으로 궁궐에서 죽을 뻔하였으나, 도방의 구출로 살아난 뒤 왕을 원망하고 이를 폐위하여 강화(江華)로 내쫓고 한남공(漢南公) 정(貞: 강종)을 즉위시켰다.

이듬해 그의 흥녕부를 고쳐 진강부(晉康府)라 하였으며, 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文經武緯嚮里措安功臣)에 봉하여졌다.

1214년(고종 1)에 그의 처 임씨(任氏)수성택주(綬成宅主), 왕씨(王氏)정화택주(靜和宅主)가 되었다.

1218년에 나이 70세가 되므로 궤장(凡杖)을 하사받았다.
7. 민란 평정과 집권체제 확립
무신정권 수립 이후 하층구조와 사원 세력에 의한 반란이 거듭 일어났으며, 최충헌이 집권한 뒤에도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1198년에는 개성에서 만적의 난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에는 명주(溟州: 江陵)동경(東京: 慶州)에서 도둑이 일어나 주군(州郡)을 침범, 약탈하였다.

또한, 1200년에는 진주의 이(吏) 정방의(鄭方義)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전주에서는 잡족인(雜族人)이 난을 일으켜 호족(豪族)을 죽였으며, 경주에서는 최대의(崔大義) 등이 난을 일으켰다.

그리고 1202년에는 탐라(耽羅: 濟州島)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경주에서는 별초군(別抄軍)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듬해에는 영주 부석사와 대구 부인사(符仁寺)의 중들이 반란을 꾸미다가 잡혀 귀양갔다.

또한, 1217년에는 흥왕사(興王寺)‧홍원사(弘圓寺)‧경복사(景福寺) 등의 중들이 최충헌을 살해하려다가 실패한 일이 일어났다.

이렇게 거듭 일어나는 반란에 대하여 강경책을 써서 토벌을 강행하는 한편, 혹은 관작(官爵)도 주고 혹은 향(鄕)‧소(所)‧부곡(部曲) 등의 천민을 해방시켜 현(縣)으로 승격시키기도 하는 회유책을 써서 반란을 진압시키는 데 성공하여 그로 하여금 강력한 집권체제를 수립할 수 있는 중요한 뒷받침이 되었다. 시호는 경성(景成)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國李相國集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