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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의(鄭方義)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815BC29C758D1201X0
생년?(미상)
졸년1201(신종 4)
시대고려중기
본관진양(晉陽)
활동분야변란 > 민란주모자
출신지진주

[상세내용]

정방의(鄭方義)
미상∼1201년(신종 4). 고려의 민란주모자. 본관은 진양(晉陽)(주1)
본관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을 참고하여 본관을 진양(晉陽)으로 추가함.
. 진주 출신의 향리이다.

1200년 진주의 공사(公私)노예가 난을 일으켜 주리(州吏)의 집 50여호를 약탈하고 불을 질러 그의 집에까지 번지자, 활과 화살을 가지고 나타났으므로, 사록(司錄) 전수룡(全守龍)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의심하여 고문하였으나 증거가 없어 풀어주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목사 이순중(李淳中)이 그가 난을 일으키려 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하여 옥에 가두고 국문하려고 할 때, 동생 창대(昌大)가 나타나 부축하여 도망갔다.

그뒤 무리를 지어 평소 원한이 있던 자들을 죽이니 그 수가 6,400여명이었다고 한다.

이순중은 각문(閣門)을 닫고 나오지 않고, 그들은 은병(銀甁)을 거두어 권신에게 바쳐 죄를 면하고자 하였다.

이때 안찰부사(按察副使) 손공례(孫公禮)진주에 이르러 이 사실을 안문하는데, 이민(吏民)들이 모두 정방의에게 죄가 없다고 하므로 도리어 이순중이 초도(草島)에 유배되었다.

그뒤 소부감(小府監) 조통(趙通), 중낭장 이당적(李唐績) 등을 보내어 안무하게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진주사람들은 합주(陜州)에서 난을 일으킨 광명(光明)계발(計勃)의 무리를 끌어들여 진압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정방의의 무리는 그 기세를 타 노올부곡(奴兀部曲)까지 이르러 그 무리들을 다 죽였다.

1201년 진주사람들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으며, 아우 창대의 무리 200여명도 평정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이상선(李相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