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신무왕(神武王)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2E0BB34C655D0839X0
자(字)윤린(允璘)
시호(諡號)신무(神武)
생년?(미상)
졸년839(신무왕 1)
시대통일신라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왕실 > 왕
김균정(金均貞)
진교부인(眞橋夫人)
조부혜강대왕(惠康大王)
조부김예영(金禮英)
묘소제형산(弟兄山)

[상세내용]

신무왕(神武王)
미상∼839년(신무왕 1). 신라 제45대왕. 재위 839년 4월∼7월.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우징(祐徵). 할아버지는 혜강대왕(惠康大王)으로 추봉된 원성왕의 아들 김예영(金禮英)이며, 부친은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봉해진 균정(均貞), 모친은 헌목태후(憲穆太后)로 봉해진 진교부인(眞橋夫人) 박씨(朴氏)이다.

그가 아버지 균정과 함께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부상하게 되는 것은 헌덕왕 때였다. 812년(헌덕왕 4)에 균정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며, 김헌창(金憲昌)의 난이 일어나자 우징 부자는 왕을 도와 반란군을 평정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828년(흥덕왕 3)에 우징시중에 임명되었다.

834년에 균정상대등에 피임되자 우징은 아버지가 재상(宰相)이 되었다는 이유로 시중직을 사퇴하고 대신 김명(金明: 민애왕)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균정김명간의 대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흥덕왕이 죽자 그 사촌동생인 균정과 오촌 조카인 제륭(悌隆: 희강왕)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김명아찬(阿飡) 이홍(利弘)배훤백(裵萱伯) 등은 제륭을 받들고 우징과 조카인 예징(禮徵)김양(金陽)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워 균정은 전사하고, 우징김양 등과 더불어 청해진(淸海鎭)으로 도망하여 장보고(張保皐)에게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여 희강왕이 되었으나, 838년(희강왕 3)에 김명이홍 등과 함께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보전할 수 없음을 알고 자진하였다. 김명은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나, 그뒤 균정계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민애왕 1) 청해진에 의탁해 있던 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000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하여 진격해왔다. 김양염장(閻長)장변(張弁)정년(鄭年)낙금(駱金)장건영(張建榮)이순행(李順行)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이해 12월 민애왕김민주(金敏周) 등을 파견하여 무주(武州: 지금의 光州)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그 다음해 정월 달벌(達伐: 지금의 大邱지역)에서 왕군과 토벌군이 맞부닥치게 되었다.

이때 민애왕을 대신하여 왕군을 이끈 자는 대흔(大昕)윤린(允璘) 등이었는데, 토벌군에게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난중에 월유댁(月遊宅)으로 도망갔으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고, 우징이 왕이 되었다. 신무왕의 즉위는 원성왕의 큰아들인 인겸계(仁謙系)와 균정계세력의 대립 중 균정계의 승리를 의미한다.

균정계가 승리한 데에는 청해진세력과 이미 거세된 김주원계(金周元系)의 후손인 김양의 도움이 컸다. 신무왕은 즉위한 지 반년도 못 되어 죽었기 때문에 별다른 경륜을 펴지 못하였으나, 다만 그는 장보고김양에 대하여 배려하고 있었던듯하다.

839년에 장보고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아 2,000호(戶)의 실봉(實封)을 내렸다. 반면 장보고도 이에 그치지 않고 딸을 왕비로 세우려 하였다. 이것은 청해진세력의 강대함을 알려준다. 신무왕장보고 등 왕권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을 제압하여야 하는 과업을 앞두고 돌아갔다. 능은 제형산(弟兄山) 서북에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집필자]

김두진(金杜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