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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金陽){1}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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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위흔(魏昕)
생년808(애장왕 9)
졸년857(문성왕 19)
시대통일신라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왕실 > 왕족
김정여(金貞茹)
조부김종기(金宗基)
증조부김주원(金周元)

[상세내용]

김양(金陽)
808년(애장왕 9)∼857년(문성왕 19). 신라의 왕족이며 정치가. 자는 위흔(魏昕). 태종무열왕의 9대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찬 김주원(金周元), 할아버지는 소판 김종기(金宗基), 부친은 파진찬 김정여(金貞茹)이다.

그의 집안은 780년(혜공왕 16)에 태종무열왕계의 왕통이 무너진 뒤에도 계속 건재하여, 대대로 시중(侍中)을 역임하는 등 정계에서 요직을 차지하였다.

특히, 822년(헌덕왕 14)에 그의 할아버지와 형제 항렬인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그 일당이 모두 살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종기의 집안만은 피해를 입지 않은 채 정계에서 활약하였다.

828년(흥덕왕 3)에 고성군태수(固城郡太守)가 되고, 이어 중원소경(中原小京) 대윤(大尹), 무주도독(武州都督)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좋은 치적을 남겨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836년 12월 흥덕왕이 죽은 뒤 균정(均貞)제륭(悌隆)사이에 왕위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그는 균정을 왕으로 추대하고 적판궁(積板宮)에 들어가 족병(族兵)으로써 숙위하였으나 제륭 일파의 기습을 받아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였다.

이때 그는 제륭의 부하인 배훤백(裵萱伯)이 쏜 화살에 다리를 맞은 채, 포위망을 뚫고 경주 북쪽인 한기(漢岐) 방면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뒤 838년(희강왕 3) 정월에 상대등 김명(金明)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그는 2월에 병사를 모집하여 청해진(淸海鎭)으로 떠났다.

이때 청해진에는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청해진 대사(大使)장보고(張保皐)와 더불어 복수를 꾀하고 있었는데, 그는 김우징장보고와 함께 민애왕을 타도하기로 모의하고 그해 3월 강병 5천명으로 무주를 습격, 이를 함락시키고 다시 남원에 진출하여 정부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병사들이 피로한 기색을 보이자 일단 청해진으로 철수하였다. 다시 12월에 그는 평동장군(平東將軍)으로서 장보고 휘하의 강병 5천명을 이끌고 경주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이때 그의 군대는 무주 철야현(鐵冶縣)에서 김민주(金敏周)휘하의 정부군의 저항을 받았으나, 기병 3천명으로써 적진에 돌격하여 이를 섬멸하였다. 이어 839년 정월에는 대구(大丘)로 진격하여 민애왕이 거느린 정부군을 격파하고 왕도 죽였다.

이로써 경주의 왕성(王城)을 수복한 그는 4월에 우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배훤백을 비롯하여 민애왕정권의 요직에 있던 사람들을 관대하게 용서하여 인심을 얻었다.

7월 신무왕이 재위 3개월 만에 죽자 아들 문성왕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반정공로(反正功勞)로 소판 겸 창부령(倉部令)을 제수받았다.

그뒤 이찬에 오른 그는 847년(문성왕 9) 8월 시중이 되어 이듬해까지 재임하였다. 시중 퇴직 뒤에도 그는 병부령(兵部令)으로서 문성왕에 중용되었다.

한편, 그는 당나라로부터 검교위위경(檢校衛尉卿)을 받기도 하였다.

857년 8월 13일에 50세로 죽었다. 부음이 전해지자 문성왕서발한(舒發翰)으로 추증하고, 부의(賻儀)와 염장(殮葬)을 모두 김유신(金庾信)의 예에 따라 행하게 하였다. 그해 12월 8일 태종무열왕의 능렬(陵列)에 배장(陪葬)되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新羅下代의 執事省(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新羅 元聖王系의 王位交替(吳星, 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79)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新羅下代 均貞系의 王位繼承과 金陽(尹炳喜, 歷史學報 96, 1982)

[집필자]

이기동(李基東)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