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강왕(僖康王)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76CAC15C655D0838X0 |
이명(異名) | 김제륭(金悌隆) |
생년 | ?(미상) |
졸년 | 838(민애왕 1) |
시대 | 통일신라 |
본관 | 경주(慶州) |
활동분야 | 왕실 > 왕 |

부 | 김헌정(金憲貞) |
모 | 포도부인(包道夫人) |
처 | 문목부인 김씨(文穆夫人金氏) |
처부 | 충공갈문왕(忠恭葛文王) |
외조부 | 충효(忠孝) |
묘소 | 소산(蘇山) |

[상세내용]
희강왕(僖康王)
미상∼838년(민애왕 1). 신라 제43대 왕. 재위 836∼838년.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제륭(悌隆 혹은 愷隆‧悌顒).
부친은 원성왕의 손자로 익성대왕(翌成大王)으로 추봉된 김헌정(金憲貞, 일명 草奴)이고, 모친은 순성태후(順成太后)로 추봉된 각간(角干) 충효(忠孝)의 딸 포도부인(包道夫人, 혹은 美道‧梁乃‧巴利夫人)이다. 왕비는 충공갈문왕(忠恭葛文王)의 딸 문목부인(文穆夫人) 김씨(金氏)이다. 아들은 뒤에 의공대왕(懿恭大王)으로 봉해진 계명(啓明)이다.
왕이 되기 전제륭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아버지 헌정이 819년(헌덕왕 11)에 병으로 다닐 수 없게 되자 왕으로부터 금장식의 자색 단장(檀杖)이 하사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사촌동생인 균정(均貞)과 5촌조카인 제륭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시중인 김명(金明)과 아찬(阿飡) 이홍(利弘)‧배훤백(裵萱伯)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김우징(金祐徵)과 조카인 예징(禮徵) 및 김양(金陽)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은 화살을 맞아 우징 등과 더불어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궁복(弓福: 장보고)에게로 달아나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였고, 김명이 상대등(上大等)에, 이홍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838년(희강왕 3)에 불만을 가진 김명‧이홍 등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보전할 수 없음을 알고 자진하였다. 소산(蘇山)에 장사하였다.
부친은 원성왕의 손자로 익성대왕(翌成大王)으로 추봉된 김헌정(金憲貞, 일명 草奴)이고, 모친은 순성태후(順成太后)로 추봉된 각간(角干) 충효(忠孝)의 딸 포도부인(包道夫人, 혹은 美道‧梁乃‧巴利夫人)이다. 왕비는 충공갈문왕(忠恭葛文王)의 딸 문목부인(文穆夫人) 김씨(金氏)이다. 아들은 뒤에 의공대왕(懿恭大王)으로 봉해진 계명(啓明)이다.
왕이 되기 전제륭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아버지 헌정이 819년(헌덕왕 11)에 병으로 다닐 수 없게 되자 왕으로부터 금장식의 자색 단장(檀杖)이 하사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사촌동생인 균정(均貞)과 5촌조카인 제륭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시중인 김명(金明)과 아찬(阿飡) 이홍(利弘)‧배훤백(裵萱伯)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김우징(金祐徵)과 조카인 예징(禮徵) 및 김양(金陽)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은 화살을 맞아 우징 등과 더불어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궁복(弓福: 장보고)에게로 달아나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였고, 김명이 상대등(上大等)에, 이홍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838년(희강왕 3)에 불만을 가진 김명‧이홍 등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보전할 수 없음을 알고 자진하였다. 소산(蘇山)에 장사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執事省(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執事省(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집필자]
김두진(金杜珍)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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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