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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聖德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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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김융기(金隆基)
이명(異名)김흥광(金興光)
시호(諡號)성덕(聖德)
생년?(미상)
졸년737(성덕왕 36)
시대통일신라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왕실 > 왕
성정왕후(成貞王后)
소덕왕후(炤德王后)
처부김원태(金元太)
처부김순원(金順元)
묘소경주시 조양동

[상세내용]

성덕왕(聖德王)
미상∼737년(성덕왕 36). 신라 제33대왕. 재위 702∼737년.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본래 융기(隆基)였으나 뒤에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1. 가계
신문왕의 둘째아들이며 효소왕의 동모제(同母弟)이다.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었으므로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비는 전비(前妃)는 704년(성덕왕 3)에 승부령(乘府令)이던 소판(蘇判) 김원태(金元太)의 딸인 성정왕후(成貞王后, 혹은 嚴貞王后)를 맞아들였으나 성덕왕 15년에 왕궁에서 내보내고,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 소덕왕후(炤德王后)를 계비로 맞이하였다.
2. 내치
성덕왕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의 정치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사회전반에 걸쳐서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다. 우선 정치적으로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는 집사부(執事部)중시(中侍)가 일체의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됨에 따라 전제왕권은 보다 강화될 수 있었다.

아찬(阿飡) 원훈(元訓)성덕왕이 즉위하던 702년에 중시에 임명된 이래로 원문(元文)신정(信貞)김문량(金文良)김위문(金魏文)효정(孝貞)김사공(金思恭)문림(文林)선종(宣宗)윤충(允忠) 등 10명의 인물이 성덕왕대에 중시로서 활동하였다.

특히, 이들 중에서 원훈사공선종의 경우에는 천재지이(天災地異)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남으로써 중시가 전제왕권의 안정을 위한 방파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711년에는 왕이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군신(群臣)에게 제시하였다. 백관잠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전제왕권하에서 신하가 지켜야 할 계명(誡命)을 적은 것으로서 유교적인 충군사상(忠君思想)이 주요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이, 성덕왕대에 있어서 귀족세력의 약화는 귀족회의의 대표자였던 상대등의 위축된 활동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성덕왕대에는 효소왕 때부터 활동하던 이찬 개원(愷元)을 비롯하여 인품(仁品)배부(裵賦)사공 등 4명이 상대등으로 재직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3. 외교정책
성덕왕은 국내의 정치안정을 기반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추진하였다.

703년에 일본국의 사신을 접견하는 등 일본과의 관계도 유지하였지만, 특히 당나라와의 관계는 더욱 밀접하여졌다.

703년에 아찬(阿飡) 김사양(金思讓)당나라에 조공한 이래 36년 동안 당에 파견된 신라의 사절횟수는 43회로서 신라 중대왕실의 다른 어느 왕 때보다도 많았으며 사절의 내용은 주로 조공과 숙위(宿衛), 그리고 하정(賀正)이었다.

이러한 당과의 빈번한 외교적 교섭은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확고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물의 수입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704년에 입당사(入唐使) 김사양이 귀국하여 최승왕경(最勝王經)을 바쳤고, 717년에는 숙위 김수충(金守忠)이 귀국하여 문선왕과 10철(哲) 및 72제자의 화상(畵像)을 바치므로 국학(國學)에 봉안하였다. 이는 전제왕권 안정에 필요한 정치이념으로서의 유교의 적극적 수용의지를 반영한 것이며, 728년에는 왕제인 김사종(金嗣宗)당나라에 파견하면서 신라 귀족자제들의 당나라 국학의 입학을 요청하였다.
4. 위민농본정책
717년에 의학박사산박사(算博士)를 각각 1인씩 두었고, 718년에는 누각(漏刻)을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기술관계의 관직설치와 시설은 모두 유교적 이상정치인 위민 및 농본정책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성덕왕의 위민 및 농본정책은 특히 705년에 동쪽 주군(州郡)의 백성들이 굶주려서 유망(流亡)하므로 관리를 파견하여 진휼하고, 706년에는 국내에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으며, 6년에는 백성들에게 오곡의 종자를 나누어준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722년에는 모든 백성들에게 비로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는데, 정전은 정(丁)을 기준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지급한 토지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실제적으로 백성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영농민(自營農民)이 본래 소유하고 있던 토지에 대한 국가적 인정을 뜻하는 것으로서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 국가는 농민으로부터 많은 세를 거두어들임으로써 재정적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게 되었다.
5. 국방정책
국방시책으로는 721년에 하슬라도(何瑟羅道: 지금의 강릉)의 정부(丁夫) 2,000명을 징발하여 북경지방에 장성을 축조하는가 하면 722년에는 모벌군성(毛伐群城: 지금의 경주시 외동면)을 축조하여 일본의 침입로를 차단하기도 하였다.

731년에 일본의 병선 300척이 동해변을 습격하자 이를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733년에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고구려의 고지에서 건국하여 신라와 사실상 국경을 접하고 있던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735년에는 당나라와의 외교적 현안이었던 국경문제를 패강(浿江: 지금의 大同江)으로 확정지었다. 이로써, 신라의 영토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지역으로 결정되었다. 성덕왕은 이 지역의 민심수습과 북방경영을 위하여 이찬 윤충(允忠)사인(思仁)영술(英述) 등을 파견하여 평양주우두주(牛頭州: 지금의 춘천)의 지세를 조사하게 하였다.

시호는 성덕(聖德)이며, 이거사(移車寺)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왕릉은 현재 경주시 조양동에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政治社會史硏究(李基白, 一潮閣, 1977)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申瀅植, 韓國史論叢 2, 1977)

[집필자]

김영하(金瑛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