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승(李鍾承)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885C2B9B1828X0 |
자(字) | 총선(總仙) |
생년 | 1828(순조 28)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부 | 이규남(李圭男) |
생부 | 규철(圭徹) |

[상세내용]
이종승(李鍾承)
1828년(순조 28)∼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총선(總仙). 병조판서 규철(圭徹)의 아들로 이규남(李圭男)에게 입양되었으며, 군부대신 종건(鍾健)의 형이다.
1858년(철종 9) 황해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종실(宗室)로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던 대원군에 의하여 1865년(고종 2)부터 만 2년 동안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낸 뒤 좌포도대장‧함경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874년 좌포도대장으로 세곡선 부정과 명화적(明火賊)의 발호를 막지 못하였다고 파면되었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은 뒤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해안방비에 힘썼다.
그뒤 금위대장과 강화도유수‧공조판서를 거쳐,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에 좌포도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난민들이 남산 아래 이동(泥洞)에 있던 그의 집을 습격하여 가재도구를 파괴하자 시골로 피신하였으며, 그의 집은 제물포조약을 강요하려는 일본 하나부사(花房義質)공사가 이끌고 온 일본군의 주둔처가 되었다.
1885년 여전히 시골에서 올라오지 않자, 정부에서는 유배를 명하였다가 곧 한성부판윤을 제수하였다.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면서 감사와 항례(抗禮)하는 특전을 부여받았다.
그뒤 형조판서‧전환국총판(典圜局總辦)‧판의금부사를 거쳐, 1900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1858년(철종 9) 황해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종실(宗室)로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던 대원군에 의하여 1865년(고종 2)부터 만 2년 동안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낸 뒤 좌포도대장‧함경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874년 좌포도대장으로 세곡선 부정과 명화적(明火賊)의 발호를 막지 못하였다고 파면되었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은 뒤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해안방비에 힘썼다.
그뒤 금위대장과 강화도유수‧공조판서를 거쳐,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에 좌포도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난민들이 남산 아래 이동(泥洞)에 있던 그의 집을 습격하여 가재도구를 파괴하자 시골로 피신하였으며, 그의 집은 제물포조약을 강요하려는 일본 하나부사(花房義質)공사가 이끌고 온 일본군의 주둔처가 되었다.
1885년 여전히 시골에서 올라오지 않자, 정부에서는 유배를 명하였다가 곧 한성부판윤을 제수하였다.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면서 감사와 항례(抗禮)하는 특전을 부여받았다.
그뒤 형조판서‧전환국총판(典圜局總辦)‧판의금부사를 거쳐, 1900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高宗實錄
金甌錄
東邦關係(渡邊修二郞, 1894)
高宗實錄
金甌錄
東邦關係(渡邊修二郞, 1894)
[집필자]
장영민(張泳敏)
대표명 | 이종승(李鍾承) |
성명 | 이종승(李鍾承) |
성명 : "이종승(李鍾承)"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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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