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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필(李裕弼)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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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85(고종 22)
졸년1945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평안북도 의주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유필(李裕弼)
1885년(고종 22)∼1945년. 독립운동가. 일명 우필(祐弼)춘산(春山). 평안북도 의주 출신.

1911년 이른바 105인사건(百五人事件)에 연루되어 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이승훈(李昇薰)차이석(車利錫) 등과 같이 잡혀 전라남도 진도에 1년 동안 유배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 향리인 의주일대에서 태극기와 선전문을 제작, 배포하면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수배받고 상해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될 때 내무부비서국장을 역임하였다.

1920년 8월에는 미국회의원단이 한국을 시찰할 때 대미외교를 전개하기 위하여 안창호를 준비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정인과(鄭仁果)여운형(呂運亨)여운홍(呂運弘)손두환(孫斗煥) 등과 함께 1,400원의 예산으로 이들을 접대, 한국의 독립운동을 설명하고 지원하여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1922년 10월 김구손정도(孫貞道)양기하(梁基瑕) 등과 같이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이사와 경리부장‧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0년 동안 존속된 한국노병회는 독립운동에 지대한 공로를 남겼다.

1923년 교민단단장 겸 인성학교(仁成學校)교장으로 인권옹호와 독립운동가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먼저 조선혼을 기르고, 보습과와 도서관도 신축할 것을 천명, 의욕적인 민중계도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뒤 교민단의 회계검사원, 임시정부국무원(내무총장 등) 등을 역임하였다.

1924년 교민단 주최로 3‧1절기념식을 거행할 때에는 사회자로 무궁화를 선창하여 군중을 감동시켰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기관지인 『상해한문(上海韓聞)』의 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뒤 한국노병회의 이사장을 거쳐 1926년 임시정부국무원 겸 재무장이 되었고,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거의 주모자로 잡혀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春山 李裕弼小史(金樂山, 1943)
朝鮮獨立運動(金正明, 原書房, 1967)
독립운동사 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韓國獨立運動史資料 3(國史編纂委員會, 1973)
大韓民國臨時政府史(李炫熙, 集文堂, 1982)
臨政과 李東寧硏究(李炫熙, 一潮閣, 1989)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第二課編, 東文社書店, 1946)

[집필자]

이현희(李炫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