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석(車利錫)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C28C774C11DB1881X0 |
이명(異名) | 성입환(徐立煥) |
호(號) | 동암(東巖) |
생년 | 1881(고종 18) |
졸년 | 1945 |
시대 | 항일기 |
활동분야 | 호국 > 독립운동가 |
출신지 | 평안북도 선천 |
묘소 | 서울 효창원 |
공훈 | 건국훈장 국민장 |
[상세내용]
차이석(車利錫)
1881년(고종 18)∼1945년. 독립운동가. 일명 서입환(徐立煥). 호는 동암(東巖). 평안북도 선천 출신.
1907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한 뒤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평안도에서 대성학교(大成學校)를 경영하면서 인재육성에 진력하였다.
1910년 12월 일제가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1911년 1월에 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4월 상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의 기자로 활약하였다.
같은해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에 선임되었고, 1928년 3월 민족진영 독립지사의 단결을 공고히 구축하기 위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고 그 주요 실무간부로 선임되었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홍보선전책자로 「한보(韓報)」‧「한성(韓聲)」 등을 발행, 배포하는 등 당의 기본강령의 실천과 그 이념 전파에 진력하였다.
1933년 항저우(杭州)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대일투쟁의욕 진작에 노력하였고,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도 활약하였다.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에 의한 5당(義烈團‧新韓獨立黨‧朝鮮革命黨‧韓國獨立黨‧美洲大韓人獨立黨) 통합을 통하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조직될 때 5당 통일에 주도적인 임무를 담당한 김원봉(金元鳳)‧김두봉(金枓奉) 등 의열단계가 임시정부의 폐쇄를 강력히 주장하여 임시정부가 다시 곤경에 처하였으며, 더욱이 임시정부국무위원 중 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최동오(崔東旿)‧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 등 5명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담하게 되어 임시정부 자체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때 송병조(宋秉祚)와 함께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김붕준(金朋濬)‧양묵(楊墨)‧이동녕(李東寧)‧안공근(安恭根)‧엄항섭(嚴恒燮) 등과 협의, 임시정부를 고수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유지, 계승, 발전시켰다.
1935년 2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를 개최하여 주석에 이동녕을 선출함으로써 국무위원회(國務委員會)를 조직하였는바, 그때 비서장(祕書長)에 선출되어 1945년까지 그 직책을 고수하면서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충칭(重慶)에서 죽었다.
1947년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가 운구되어 서울 효창원에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07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한 뒤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평안도에서 대성학교(大成學校)를 경영하면서 인재육성에 진력하였다.
1910년 12월 일제가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1911년 1월에 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4월 상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의 기자로 활약하였다.
같은해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에 선임되었고, 1928년 3월 민족진영 독립지사의 단결을 공고히 구축하기 위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고 그 주요 실무간부로 선임되었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홍보선전책자로 「한보(韓報)」‧「한성(韓聲)」 등을 발행, 배포하는 등 당의 기본강령의 실천과 그 이념 전파에 진력하였다.
1933년 항저우(杭州)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대일투쟁의욕 진작에 노력하였고,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도 활약하였다.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에 의한 5당(義烈團‧新韓獨立黨‧朝鮮革命黨‧韓國獨立黨‧美洲大韓人獨立黨) 통합을 통하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조직될 때 5당 통일에 주도적인 임무를 담당한 김원봉(金元鳳)‧김두봉(金枓奉) 등 의열단계가 임시정부의 폐쇄를 강력히 주장하여 임시정부가 다시 곤경에 처하였으며, 더욱이 임시정부국무위원 중 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최동오(崔東旿)‧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 등 5명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담하게 되어 임시정부 자체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때 송병조(宋秉祚)와 함께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김붕준(金朋濬)‧양묵(楊墨)‧이동녕(李東寧)‧안공근(安恭根)‧엄항섭(嚴恒燮) 등과 협의, 임시정부를 고수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유지, 계승, 발전시켰다.
1935년 2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를 개최하여 주석에 이동녕을 선출함으로써 국무위원회(國務委員會)를 조직하였는바, 그때 비서장(祕書長)에 선출되어 1945년까지 그 직책을 고수하면서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충칭(重慶)에서 죽었다.
1947년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가 운구되어 서울 효창원에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韓國獨立運動史(愛國同志援護會, 1956)
독립운동사 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국회도서관, 1974)
大韓民國臨時政府史(李炫熙, 集文堂, 1982)
獨立有功者功勳錄 5(國家報勳處, 1988)
독립운동사 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국회도서관, 1974)
大韓民國臨時政府史(李炫熙, 集文堂, 1982)
獨立有功者功勳錄 5(國家報勳處, 1988)
[집필자]
이현희(李炫熙)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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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