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익(李容翊)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6A9C775B1854X0 |
생년 | 1854(철종 5) |
졸년 | 1907(융희 1)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정치 > 정치가 |
출신지 | 함경북도 명천 |
[상세내용]
이용익(李容翊)
1854년(철종 5)∼1907년(융희 1). 한말의 정치가. 본관은 전주(全州). 함경북도 명천 출신. 소년시절에 서당에서 수학하였다.
고향을 떠나 한때 보부상으로 행상하여 약간의 자금을 모아 금광에 투자하여 거부가 되었다. 재화를 왕실에 기부하여 감역(監役)이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발이 빠른 그는 충주로 피신한 민비(閔妃)와 민씨정권의 영도자인 민영익(閔泳翊)사이의 비밀연락을 담당하였고, 민영익의 천거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출세의 길을 잡았다.
정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1897년 내장원경(內藏院卿)에 발탁되었을 때부터이다. 왕실재정을 관리하게 되어 궁내부 소속의 삼포(蔘圃)와 광산을 엄중 관리하여 왕실수입을 늘렸고, 탁지부대신을 겸직하였다.
또한, 전환국장(典圜局長)마저 겸무하게 되자 1800년 개정화폐조례(改正貨幣條例)에 따라 파탄지경이 된 국가재정을 충당하고자 백동화(白銅貨)를 대량 발주하였다.
그러나 그의 백동전 남주(濫鑄)는 물가앙등과 화폐가치 하락을 가져와 유통계에 혼란을 일으켜 실패하였다. 출생이 미천하고 정통적인 유교교양을 갖추지 못하고 우직하였으나, 청렴하고 정치가로서의 식견은 탁월하였다.
감리서북광무 겸 철도사감사(監理西北鑛務兼鐵道司監司)‧서북철도국총재‧원수부회계국장‧중앙은행총재를 역임하면서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즉, 궁내부 내장사의 직조소(織造所)를 근대적 공장으로 개편하고자 그 소속으로 모범양잠소를 설치하여 근대적 견직기술을 강습하게 하였고, 각 도에 공업전습소를 설치하여 염직‧직조업‧제지업‧금은세공‧목공의 근대 기술자 양성을 시도하였다.
또, 사기제조소를 서울에 설치, 일본 기술자를 초빙하여 사기제작을 시작하였으며, 총포공장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1898년 정부에서 근대식 석판인쇄기계를 도입하여 우표‧상표지계 등을 인쇄, 발매하고, 1903년에는 박람회개최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철도의 부설, 근대금융기관의 설립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의 근대적 개혁에 그의 진언이 크게 작용하였다 한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친로반일(親露反日)로 일관되는 것이어서,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의 국외엄정중립을 선언하게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그를 붙잡아 일본으로 압송하고 갖가지의 회유정책을 썼으나 포섭할 수 없었다.
1905년 1월 일본으로부터 귀국하자 잠시 경상북도관찰사‧제실회계심사국장‧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러한 공직에 있으면서도 항일투쟁의 선두에 섰으며, 특히 일진회의 타도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일본에 납치되어 있을 때 일본의 개화문물에 접하고 귀국하면서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입, 지참한 뒤, 민족의 역량을 배육하고자 자비로 보성소학(普成小學)과 중학 그리고 전문학교를 설립하여 장차 국가의 동량이 될 인재를 키워내기에 힘썼으며, 신해영(申海永)‧김주병(金柱炳)과 더불어 편집소인 보성관(普成館),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를 설치하여 민족계몽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체결로 국권이 박탈되고 이른바 보호정치가 시작되자, 육군부장(陸軍副長)이라는 직명으로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원조를 요청하기 위하여 고국을 탈출, 프랑스로 향하던 중 6월에 중국 산둥성옌타이항(山東省煙臺港)에서 일본관헌에게 발각되었다.
이때에 조선정부는 밀령의 책임을 추궁받을까 하여 그를 일체의 공직으로부터 파면해버렸다.
그뒤 해외를 유랑하면서 계속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죽었다.
고향을 떠나 한때 보부상으로 행상하여 약간의 자금을 모아 금광에 투자하여 거부가 되었다. 재화를 왕실에 기부하여 감역(監役)이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발이 빠른 그는 충주로 피신한 민비(閔妃)와 민씨정권의 영도자인 민영익(閔泳翊)사이의 비밀연락을 담당하였고, 민영익의 천거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출세의 길을 잡았다.
정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1897년 내장원경(內藏院卿)에 발탁되었을 때부터이다. 왕실재정을 관리하게 되어 궁내부 소속의 삼포(蔘圃)와 광산을 엄중 관리하여 왕실수입을 늘렸고, 탁지부대신을 겸직하였다.
또한, 전환국장(典圜局長)마저 겸무하게 되자 1800년 개정화폐조례(改正貨幣條例)에 따라 파탄지경이 된 국가재정을 충당하고자 백동화(白銅貨)를 대량 발주하였다.
그러나 그의 백동전 남주(濫鑄)는 물가앙등과 화폐가치 하락을 가져와 유통계에 혼란을 일으켜 실패하였다. 출생이 미천하고 정통적인 유교교양을 갖추지 못하고 우직하였으나, 청렴하고 정치가로서의 식견은 탁월하였다.
감리서북광무 겸 철도사감사(監理西北鑛務兼鐵道司監司)‧서북철도국총재‧원수부회계국장‧중앙은행총재를 역임하면서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즉, 궁내부 내장사의 직조소(織造所)를 근대적 공장으로 개편하고자 그 소속으로 모범양잠소를 설치하여 근대적 견직기술을 강습하게 하였고, 각 도에 공업전습소를 설치하여 염직‧직조업‧제지업‧금은세공‧목공의 근대 기술자 양성을 시도하였다.
또, 사기제조소를 서울에 설치, 일본 기술자를 초빙하여 사기제작을 시작하였으며, 총포공장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1898년 정부에서 근대식 석판인쇄기계를 도입하여 우표‧상표지계 등을 인쇄, 발매하고, 1903년에는 박람회개최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철도의 부설, 근대금융기관의 설립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의 근대적 개혁에 그의 진언이 크게 작용하였다 한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친로반일(親露反日)로 일관되는 것이어서,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의 국외엄정중립을 선언하게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그를 붙잡아 일본으로 압송하고 갖가지의 회유정책을 썼으나 포섭할 수 없었다.
1905년 1월 일본으로부터 귀국하자 잠시 경상북도관찰사‧제실회계심사국장‧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러한 공직에 있으면서도 항일투쟁의 선두에 섰으며, 특히 일진회의 타도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일본에 납치되어 있을 때 일본의 개화문물에 접하고 귀국하면서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입, 지참한 뒤, 민족의 역량을 배육하고자 자비로 보성소학(普成小學)과 중학 그리고 전문학교를 설립하여 장차 국가의 동량이 될 인재를 키워내기에 힘썼으며, 신해영(申海永)‧김주병(金柱炳)과 더불어 편집소인 보성관(普成館),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를 설치하여 민족계몽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체결로 국권이 박탈되고 이른바 보호정치가 시작되자, 육군부장(陸軍副長)이라는 직명으로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원조를 요청하기 위하여 고국을 탈출, 프랑스로 향하던 중 6월에 중국 산둥성옌타이항(山東省煙臺港)에서 일본관헌에게 발각되었다.
이때에 조선정부는 밀령의 책임을 추궁받을까 하여 그를 일체의 공직으로부터 파면해버렸다.
그뒤 해외를 유랑하면서 계속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大韓季年史
梅泉野錄
朝鮮貨幣考(柳子厚, 學藝社, 1940)
梅泉野錄
朝鮮貨幣考(柳子厚, 學藝社, 1940)
[집필자]
조기준(趙璣濬)
명 : "용익(容翊)"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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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1-02-25 | 승정원일기와 사마방목을 참고하여 본관을 미상에서 전주(全州)로 수정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