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고(任聖皐)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84C131ACE0B1773X0 |
자(字) | 중안(仲岸) |
호(號) | 우연옹(偶然翁) |
시호(諡號) | 충정(忠貞) |
생년 | 1773(영조 49) |
졸년 | 1853(철종 4)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풍천(豊川)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부 | 임율(任嵂) |
[상세내용]
임성고(任聖皐)
1773년(영조 49)~1853년(철종 4).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중안(仲岸), 호는 우연옹(偶然翁). 통제사 임율(任嵂)의 아들이다.
1795년(정조 19) 무과에 급제, 1808년(순조 8) 흥덕현감을 지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박천군수로 재임중 박천을 점령당하여 인부(印符)를 가지고 안주로 가려다가 노모가 적에게 잡히자 돌아와 포박당하였다. 끝까지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 절개를 지켰으며 백성들의 요구로 죽음은 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철원부사를 거쳐 1835년(헌종 1) 삼도우군통제사 겸 수군절도사, 1837년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옮겨 좌변포도대장‧금위대장‧한성부판윤‧어영대장‧훈련대장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처음에 무의(武毅)였으나 충정(忠貞)으로 개시(改諡)되었다.
1795년(정조 19) 무과에 급제, 1808년(순조 8) 흥덕현감을 지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박천군수로 재임중 박천을 점령당하여 인부(印符)를 가지고 안주로 가려다가 노모가 적에게 잡히자 돌아와 포박당하였다. 끝까지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 절개를 지켰으며 백성들의 요구로 죽음은 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철원부사를 거쳐 1835년(헌종 1) 삼도우군통제사 겸 수군절도사, 1837년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옮겨 좌변포도대장‧금위대장‧한성부판윤‧어영대장‧훈련대장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처음에 무의(武毅)였으나 충정(忠貞)으로 개시(改諡)되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淸選考
朝鮮名臣錄
憲宗實錄
淸選考
朝鮮名臣錄
[집필자]
이재철(李在喆)
대표명 | 임성고(任聖皐) |
성명 | 임성고(任聖皐) |
성명 : "임성고(任聖皐)"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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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0-06-01 | 윤정현(尹定鉉) 찬 大夫刑曹判書兼知訓鍊院事,五衛都揔府都揔管任公謚狀을 참고하여 생졸년 1773(영조 49 계사)~1853(철종 4 계축) 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