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수(李鶴秀)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D559C218B1780X0 |
생년 | 1780(정조 4) |
졸년 | 1859(철종 10)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연안(延安)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시원(李始源) |
조부 | 이민보(李敏輔) |
외조부 | 안묵(安黙) |

[상세내용]
이학수(李鶴秀)
1780년(정조 4)~1859년(철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고(子皐), 호는 단고(丹皐), 본관은 연안(延安).
조부는 대사헌 이민보(李敏輔)이고. 부친은 이조판서 이시원(李始源)이며. 모친은 청풍김씨 현감 안묵(安黙)의 딸이다. 경상감사 김노경(金魯敬)의 질서(姪婿)이다.
1817년(순조 17) 8월에 통정대부에 오르고 1819년에 정사 홍희신(洪羲臣)과 함께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에 올랐다가 연소광구(聯疏匡救)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검교대교‧예방승지‧홍문관직제학‧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827년 정월에 비변사제조로 차임(差任)되었다가 곧 경상도관찰사로 체임(遞任)되었으나 탐욕스런 행위로 말미암아 9월에는 삭출(削黜)되고 말았다.
1830년 안동김씨 세도가인 김조순(金祖淳)의 조카뻘 되는 김교근(金敎根)과 함께 탐진모리를 꾀하다가 성균관유생들의 끈질긴 진소(陳疏)로 마침내 향리로 방축(放逐)되었고, 그뒤에도 양사에서 청죄(請罪)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그러나 1841년(헌종 7) 결국 추자도로 유배되고, 1849년 3월에 자전(慈殿)의 명에 의하여 풀러난 뒤 철종 때에 이르러 다시 도총관에 특채되고 이어 한성부판윤‧형조판서‧예조판서를 제수받았다.
그뒤 잠시 평안도관찰사‧수원부유수를 거쳐 다시 이조판서‧예조판서‧공조판서를 역임한 뒤 판돈녕부사‧판의금부사에 올랐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조부는 대사헌 이민보(李敏輔)이고. 부친은 이조판서 이시원(李始源)이며. 모친은 청풍김씨 현감 안묵(安黙)의 딸이다. 경상감사 김노경(金魯敬)의 질서(姪婿)이다.
1817년(순조 17) 8월에 통정대부에 오르고 1819년에 정사 홍희신(洪羲臣)과 함께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에 올랐다가 연소광구(聯疏匡救)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검교대교‧예방승지‧홍문관직제학‧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827년 정월에 비변사제조로 차임(差任)되었다가 곧 경상도관찰사로 체임(遞任)되었으나 탐욕스런 행위로 말미암아 9월에는 삭출(削黜)되고 말았다.
1830년 안동김씨 세도가인 김조순(金祖淳)의 조카뻘 되는 김교근(金敎根)과 함께 탐진모리를 꾀하다가 성균관유생들의 끈질긴 진소(陳疏)로 마침내 향리로 방축(放逐)되었고, 그뒤에도 양사에서 청죄(請罪)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그러나 1841년(헌종 7) 결국 추자도로 유배되고, 1849년 3월에 자전(慈殿)의 명에 의하여 풀러난 뒤 철종 때에 이르러 다시 도총관에 특채되고 이어 한성부판윤‧형조판서‧예조판서를 제수받았다.
그뒤 잠시 평안도관찰사‧수원부유수를 거쳐 다시 이조판서‧예조판서‧공조판서를 역임한 뒤 판돈녕부사‧판의금부사에 올랐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哲宗實錄
哲宗實錄
[집필자]
신정희(申正熙)
명 : "학수(鶴秀)"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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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0-05-13 | 金學性撰 輔國崇祿大夫行判敦寧府事兼吏曹判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世子右副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經筵日講官奎章閣原任直提學李公鶴秀諡狀을 참고하여, 생졸년 1780(정조 4)~1859(철종 10), 본관 연안(延安). 자 자고(子皐). 호 단고(丹皐), 시호 문헌(文獻) 추가. |
2010-05-13 | 金學性撰 輔國崇祿大夫行判敦寧府事兼吏曹判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世子右副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經筵日講官奎章閣原任直提學李公鶴秀諡狀을 참고하여, 가족관계 “조부는 대사헌 민보(敏輔)이고. 부친은 이조판서 시원(始源)이며. 모친은 청풍김씨 현감 안묵(安黙)의 딸이다” 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