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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李甲)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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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이휘선(李彙璿)
호(號)추정(秋汀)
생년1877(고종 14)
졸년1917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이응오(李膺五)
출신지평안남도 평원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갑(李甲)
1877년(고종 14)∼1917년. 독립운동가. 본명은 휘선(彙璿), 호는 추정(秋汀). 평안남도 평원 출신. 이응오(李膺五)의 아들이다.

1896년 상경하여 독립협회에 가입하였고,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이해 말 독립협회가 해산될 때 일시 구금되었다. 이후 한국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죠학교(成城學校)와 육군사관학교 보병과를 졸업하고 1904년 귀국, 이해 9월 대한제국 육군 참령(參領)이 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자 군인직을 사임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1906년 10월 박은식(朴殷植)정운복(鄭雲復)김명준(金明濬) 등 동지들과 함께 서우학회(西友學會)를 창립, 구국교육운동의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창립위원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였다.

7월 고종의 양위를 반대하다가 어담(魚潭) 등 군인출신 인물들과 함께 일시 투옥되었다.

1908년 1월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창립, 애국계몽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의 이토포살사건(伊藤博文砲殺事件) 때에 안중근과의 친분관계로 헌병대에 구속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설하려고 간부를 제1차로 망명시킬 때 선발되어 1910년 4월 안창호유동열신채호(申采浩)김희선(金羲善)이종호(李鍾浩) 등과 함께 칭다오(靑島)를 거쳐 노령으로 망명하였다.

그뒤 만주의 밀산(密山)에서 무관학교를 설립, 교장이 되어 교포 자제들에게 애국교육과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노령에서 이강(李剛)과 함께 『정교보(正敎報)』를 발행,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과 계몽활동을 하였다.

이듬해 미국에 가 있던 안창호의 주선으로 『신한민보(新韓民報)』 주필로 초청되었으나, 미국의 상륙허가를 받지 못하자 시베리아로 가서 대한인국민회원동지방회(大韓人國民會遠東地方會) 회장을 역임하였다. 만주 길림성 목릉현(穆陵縣)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韓國痛史
大韓季年史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 1971)
독립운동사 4‧5‧7‧8(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1976)

[집필자]

신용하(愼鏞廈)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