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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복(鄭雲復)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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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호국 > 지사

[상세내용]

정운복(鄭雲復)
생졸년 미상. 조선 말기의 애국지사‧언론인. 한말 애국계몽에 의한 민족의 실력증강에 따른 국권회복의 민족운동에 나서 1906년 이갑(李甲)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교육단체인 서우학회(西友學會)를 조직하여 교육기관의 확장을 강조하고, 민족의식의 고취에 힘썼다.

1908년 이준(李儁) 등이 조직한 한북학회(漢北學會)와 서우학회를 통합, 서북학회(西北學會)를 결성하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민중의 계몽과 배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 대판상업학교(大阪商業學校)한국어교사를 지냈으며, 귀국 후 국사(國事)로 유배되어 3년을 지낸 뒤 『경성일보(京城日報)』『한자신문(韓字新聞)』의 주필이 되었고, 『제국신문(帝國新聞)』이 발간되자 초대주필, 제2대사장에 취임, 애국계몽운동 및 문화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학부편집촉탁(學部編輯囑託)에도 임명되었다.

또한, 서북학회가 일제 통감부의 탄압을 받아 이갑안창호 등의 간부가 해외로 망명하자, 회장으로 피선되어 서북학회를 이끌었다.

1909년 일제의 앞잡이 단체인 일진회(一進會)의 배후조종자 우치다(內田良平) 등은 농간을 벌여 대한협회(大韓協會)‧서북학회‧일진회 등의 3파연합제휴공작을 통한 이른바 합방여론조성을 꾀하였는데, 이에 반대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병탄되고, 이어 집회와 결사의 금지령이 내려 서북학회가 해산되었으나 그뒤에도 계속하여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참고문헌]

韓國新聞史(崔埈, 一潮閣, 1960)
韓末社會團體史論攷(趙恒來, 螢雪出版社, 1972)
大韓自强會에 대하여(李鉉淙, 震檀學報 29‧30 合倂號, 1966)
韓末官人의 經歷一般(崔永禧, 史學硏究 21, 韓國史學會, 1969)
大韓協會에 관한 硏究(李鉉淙, 亞細亞硏究 39,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70)

[집필자]

조항래(趙恒來)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