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희(金春熙)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D98D76CB1855X0 |
생년 | 1855(철종 6) |
졸년 | 1926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경주(慶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항집(金恒集) |
생부 | 김승집(金升集) |
출신지 | 서울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춘희(金春熙)
1855년(철종 6)∼1926년.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서울 출신.
김승집(金升集)의 아들이며, 김항집(金恒集)에게 입양되었다. 김홍집(金弘集)의 조카이다.
1883년 5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86년 세자시강원 겸 문학(世子侍講院兼文學)이 되었다.
이듬해 이조좌랑‧이조정랑‧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를 역임하였다.
1888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1890년 동지사 겸 사은사(冬至使兼謝恩使)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그뒤 세자시강원보덕이 되어 별시의 시관을 맡았으며, 12월에는 이조참판이 되었다.
1891년 다시 세자시강원의 겸보덕(兼輔德)을 거쳐 1893년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1894년 6월 갑오경장으로 작은아버지 김홍집이 총리대신이 되어 내각을 조직할 때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경연청부학사(經筵廳副學士)가 되었다.
이무렵 갑신정변 주역의 한 사람인 박영효(朴泳孝)가 10년 만에 귀국, 정치활동을 재개하려고 하자 그들의 권력 분할을 초래할 것을 우려, 신정부내의 개화파인사 안경수(安駉壽)‧김홍집‧김가진(金嘉鎭) 등과 박영효의 복권을 견제하기 위한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뒤 1907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곧 이어 승녕부(承寧府)의 시종장(侍從長)에 임명되었다.
1909년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초에는 승녕부시종장으로서 황태자 문후차 동경에 다녀와 훈2등(勳二等)에 특서되었다. 국권상실 후 일제로부터 남작과 은사금 3만엔을 받고 덕수궁찬시(德壽宮贊侍)가 되었다.
김승집(金升集)의 아들이며, 김항집(金恒集)에게 입양되었다. 김홍집(金弘集)의 조카이다.
1883년 5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86년 세자시강원 겸 문학(世子侍講院兼文學)이 되었다.
이듬해 이조좌랑‧이조정랑‧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를 역임하였다.
1888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1890년 동지사 겸 사은사(冬至使兼謝恩使)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그뒤 세자시강원보덕이 되어 별시의 시관을 맡았으며, 12월에는 이조참판이 되었다.
1891년 다시 세자시강원의 겸보덕(兼輔德)을 거쳐 1893년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1894년 6월 갑오경장으로 작은아버지 김홍집이 총리대신이 되어 내각을 조직할 때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경연청부학사(經筵廳副學士)가 되었다.
이무렵 갑신정변 주역의 한 사람인 박영효(朴泳孝)가 10년 만에 귀국, 정치활동을 재개하려고 하자 그들의 권력 분할을 초래할 것을 우려, 신정부내의 개화파인사 안경수(安駉壽)‧김홍집‧김가진(金嘉鎭) 등과 박영효의 복권을 견제하기 위한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뒤 1907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곧 이어 승녕부(承寧府)의 시종장(侍從長)에 임명되었다.
1909년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초에는 승녕부시종장으로서 황태자 문후차 동경에 다녀와 훈2등(勳二等)에 특서되었다. 국권상실 후 일제로부터 남작과 은사금 3만엔을 받고 덕수궁찬시(德壽宮贊侍)가 되었다.
[참고문헌]
日省錄
高宗實錄
純宗實錄
承政院日記
文品案
國朝榜目
續陰晴史
高宗實錄
純宗實錄
承政院日記
文品案
國朝榜目
續陰晴史
[집필자]
이완재(李完宰)
명 : "춘희(春煕)"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