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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진(金嘉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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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동농(東農)
생년1846(헌종 12)
졸년1922
시대조선후기
본관안동(安東[新])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응균(金應均)

[상세내용]

김가진(金嘉鎭)
1846년(헌종 12)∼1922년. 조선 말기의 문신‧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新]). 호는 동농(東農). 예조판서 김응균(金應均)의 아들이다.

1877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그뒤 규장각참서관(奎章閣參書官)이 되었다.

1880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881년 장례원주부(掌禮院主簿)가 되었다.

그뒤 인천항 통상사무아문주사(通商事務衙門主事)부수찬(副修撰)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장령(掌令)사복시정(司僕寺正)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1887년부터 주일본판사대신(駐日本辦事大臣)으로 4년간 동경(東京)에 주재하였으며, 1891년부터 안동대도호부부사를 지냈다.

1894년에는 군국기무처회의원(軍國機務處會議員)이 되어 내정개혁에 참여하였으며, 병조참의외무독판서리(外務督辦署理)전우국총판(電郵局總辦)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농상공부대신, 1896년 중추원일등의관을 지냈다. 갑오경장이 실패한 뒤에는 1896년 7월에 조직된 독립협회의 위원에 선임되었고, 1897년에는 신구법(新舊法)을 절충하기 위하여 설치한 교전소(校典所)지사원(知事員)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900년 중추원의장, 1902년 궁내부특진관(宮內部特進官), 1906년 충청도관찰사를 지냈으며, 대한자강회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07년 규장각제학을 역임하였고, 1909년에는 대한자강회의 계승단체인 대한협회의 회장이 되어 친일단체 일진회를 성토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수여한 남작(男爵)을 받았다가 그뒤 반납하고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의 총재 및 고문으로 추대되어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0년 3월에는 대동단 총재의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하였으며, 대동단의 박용만(朴容萬)나창헌(羅昌憲)손영직(孫永稷)고광원(高光元) 등과 공동명의로 갹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하였다.

그뒤 단원들이 붙잡혀 대동단이 해체된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으로 활약하였다. 한학과 서예로도 유명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承政院日記
日省錄
梅泉野錄
大韓季年史 上‧下
韓國痛史
韓國獨立運動之血史
독립신문
大韓每日申報
駐韓日本公使館記錄
甲午改革(元裕漢, 한국사 17, 1977)
大韓民國臨時政府史(李炫熙, 集文堂, 1982)
大同團實記(申福龍, 養英閣, 1983)
3‧1獨立運動과 臨時政府의 法統性(李炫熙, 東方圖書, 1987)

[집필자]

이현희(李炫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