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만도(李晩燾)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B9CCB3C4B1842X0
자(字)관필(觀必)
호(號)향산(響山)
생년1842(헌종 8)
졸년1910(융희 4)
시대조선후기
본관진성(眞城)
활동분야학자 > 유생
출신지경상북도 예안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이만도(李晩燾)
1842년(헌종 8)∼1910년.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 경상북도 예안 출신.

1866년(고종 3)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가 이윽고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고, 이로부터 10년간 홍문관부수찬으로서 남학교수(南學敎授)를 겸하고, 또 대신(문신)으로서 선전관을 겸하였으며, 부교리장령지평우통례(右通禮)병조정랑‧충청장시도사(忠淸掌試都事)‧교리응교사간집의중학교수(中學敎授) 등을 역임하는 동안 가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시강(侍講) 및 빈대(賓對)때에 그가 상주하는 말을 고종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다.

1876년에 일본대사 구로다(黑田淸隆)가 와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의 상소를 올리자 사헌부사간원의 합동공박을 받았는데, 그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부당하다고 말소하였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뒤 다시 복직되고,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역임하였다. 그해 가을에 양산군수에 제수되어 기민의 구휼과 탐관오리 소탕에 공을 세웠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역임하고, 1882년에 통정대부에 올라 곧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세상이 어수선하므로 환로를 단념하였는데, 당시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 백동(柏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놓고 경적을 연구하며 날을 보내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매국죄를 통박한 상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승자되었다. 그해 8월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병탄되자 유서를 지어 고결(告訣)한 뒤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집필자]

조항래(趙恒來)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