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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연(奇參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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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백마장군(白馬將軍)
자(字)경로(景魯)
호(號)성재(省齋)
생년1851(철종 2)
졸년1908(융희 2)
시대조선후기
본관행주(幸州)
활동분야학생 > 유생
기봉진(奇鳳鎭)
출신지전라남도 장성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기삼연(奇參衍)
1851년(철종 2)∼1908년. 유생‧의병장. 본관은 행주(幸州). 별명은 백마장군(白馬將軍),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省齋). 전라남도 장성 출신.

기봉진(奇鳳鎭)의 아들이다.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을미사변 이후 기우만(奇宇萬)과 거의토적(擧義討賊)을 맹세한 뒤 장성으로부터 나주로 나아가 많은 의병을 소집하여 광산(光山)에서 거의하고자 하였다.

이에 정부가 선유사(宣諭使)신기선(申箕善)이겸제(李謙濟)를 파견하여 선유하자, 의병을 해산시켰다. 재거를 밀모하던 중 일진회원의 밀고로 관찰사 조한국(曺漢國)이 파견한 전주진위대 김한정(金漢鼎)에게 붙잡혀 전주옥에 구금되었다.

다시 서울 평리원옥에 이감되어 한달 남짓 수감된 뒤 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군대해산 후 1907년 9월 수록산(隨錄山) 석수승암(石手僧庵)에서 회맹, 호남창의맹소 대장에 추대되었다. 격문을 돌려 대중에 협력하고 적에게 부역하는 자의 처단 및 재산몰수를 경고하였다.

9월 23일 고창 문수암(文殊庵)으로 진군중 접근해오는 적을 맞아 접전 끝에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고창 이민(吏民)들의 협력으로 군기와 군량을 공급받아 의병들에게 공급하고 영광부안정읍 등지에서도 연승하였다.

12월 광주최상진(崔相鎭) 등 관리의 내응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때 군량비축을 위해 법성포(法聖浦)의 세곡을 탈취할 계획으로, 12월 7일 의병 1백명은 먼저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기습하여 불태운 뒤, 그곳 창곡(倉穀)을 탈취, 군자에 보용하고 남은 것은 모두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뒤 전세의 변경으로 전투의 양상을 바꾸어 의진을 소단위로 나누는 유격전으로 돌입, 특히 김준(金準)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무동촌전투(舞童村戰鬪)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뒤 날씨가 추워져 의병들이 분산되자 각지의 산병에게 연락, 동짓날을 기약하여 장성을 공략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우산중(犀牛山中)에서 잠시 휴병한 뒤 재차 고막원(古幕院)을 공략하려다가 중도에서 철수하였다.

12월 27일 의진을 이끌고 설을 쇠기 위해 험준한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밤중에 큰비가 내려 노숙하던 사졸들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수비의 허술함을 틈타 적의 포위공격을 받았으나 갑자기 안개가 덮여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다행히 탈출하였다. 탈출한 뒤 순창 복흥(福興) 산중의 재종제인 기구연(奇九衍)의 집에서 부상을 치료하였다.

그뒤 장졸들에게 설을 쇤 다음 정월보름에 다시 모이도록 지시하고, 구수동(九水洞) 촌가에서 은신하던 중 정월초하룻날 적 수십명이 돌입하여 주인에게 총검을 들이대므로 자진하여 붙잡혔다. 비보를 접한 김준창평에서 적을 무찌르고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양(景陽)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경찰서에 수감된 뒤였다.

1908년 1월 2일 광주 서천교(西川橋) 밑 백사장에서 총살당하였다.

그뒤 호남의진은 김준이석용(李錫庸)김용구(金容球) 등 의진과 김준이 순국한 다음 조경환(曺京煥) 등의 의진에 재편되어 항일전을 계속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湖南義兵將列傳(幸州奇氏大宗中編)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抗日義兵將列傳(金義煥, 正音社, 1975)
近代民族意議의 脈絡(李鉉淙, 亞細亞文化社, 1979)
의병들의 항쟁(조동걸, 민족문화협회, 1980)

[집필자]

최근무(崔根茂)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