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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최선(李最善)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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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낙유(樂裕)
호(號)석전경인(石田耕人)
생년1825(순조 25)
졸년1883(고종 20)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학자 > 유생
이규형(李奎亨)
상산김씨(商山金氏)
성주이씨(星州李氏)
평택 임씨(平澤林氏)
처부이기대(李箕大)
외조부김문기(金文基)
출신지담양
저서『석전집(石田集)』

[상세내용]

이최선(李最善)
1825년(순조 25)∼1883년(고종 20).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유(樂裕), 호는 석전경인(石田耕人).

부친은 이규형(李奎亨)이며 모친은 상산김씨(商山金氏)김문기(金文基)의 딸이다.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이다.

양녕대군의 증손인 이서(李緖)담양군수를 지냈는데, 창평으로 귀양왔다가 담양에 눌러 살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벼슬하지 말라는 조상의 가르침을 지켜 대대로 학문에만 힘썼다.

15세에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기 시작하였으며, 1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27세에는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35세에 증광시에 합격하였으나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가슴아파하여 필마로 돌아왔다.

38세 때에는 삼정(三政)에 관한 구언이 있자, 「삼정책」을 지어 올렸으나, 담양부사 때문에 조정에 전달되지 못하였다. 병인양요 때는 호남의 종친들에게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50세 때는 문과에 응시 하였으나 과거의 폐단을 보고 출사(出仕)를 단념하였다.

52세 때에는 호남에 기근이 들자 가산을 기울여 빈민을 구하였다. 부인은 성주이씨(星州李氏) 이기대(李箕大)의 딸인데 2남2녀를 두었고, 평택 임씨(平澤林氏)와의 사이에서는 1남1녀를 두었다.

그의 사상은 성리학적으로는 기정진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하여, 기정진의 사상이 담긴 「외필(猥筆)」의 정신을 더욱 발전시키고자 「독외필(讀猥筆)」을 써서 인간 본성 속의 이(理)를 절대적 가치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외세를 철저하게 배격하여 척사위정의 정신에 투철하였다.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상소에서는, 삼정의 문란은 지방수령의 각성과 그 실천에 부족함이 있음을 말했는데, 근본적으로는 예의염치가 없는데 그 원인이 있으므로 양심의 회복으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리설에 바탕하여 척사위정을 실천한 문인이라 할 수 있다.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고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석전집(石田集)』 4권 2책이 있다.

[참고문헌]

石田集
蘆沙集
蘆沙學派의 儒學思想(安晉吾, 韓國近代宗敎思想史, 원광대학교출판국, 1984)

[집필자]

오종일(吳鍾逸)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