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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순(趙斗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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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칠(元七)
호(號)심암(心菴)
시호(諡號)문헌(文獻)
생년1796(정조 20)
졸년1870(고종 7)
시대조선후기
본관양주(楊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진익(趙鎭翼)
외조부박종악(朴宗岳)
저서『심암집』

[상세내용]

조두순(趙斗淳)
1796년(정조 20)∼1870년(고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원칠(元七), 호는 심암(心菴).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조태채(趙泰采)의 4대손 조진익(趙鎭翼)의 아들이며, 모친은 박종악(朴宗岳)의 딸이다.

1826년(순조 26) 황감제시(黃柑製試: 매년 제주도에서 진상한 밀감을 임금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하사하면서 거행하는 일종의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뽑히고, 이어 그해 4월에 열린 경과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규장각대교로 선발되었다.

그뒤 1866년(고종 3) 영의정으로 치사(致仕)하기까지 40년 동안을 줄곧 벼슬하면서 순조헌종철종고종을 보필하였으니, 순조 때에는 승지를 거쳐 대사성을 지냈고, 헌종 때에는 동지사행(冬至使行)의 부사중국에 다녀온 뒤 이조참판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841년(헌종 7) 공조판서에 올랐다.

뒤이어 형조판서한성부판윤평안도관찰사를 지내다가 1849년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헌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고, 이듬해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신도비문을 지었으며,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동문휘고(同文彙考)』의 편찬을 담당하고, 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1853년(철종 4) 우의정에 오르니, 1865년 영의정이 되기까지 지중추부사판중추부사를 역임하면서 우의정좌의정을 연임하였다.

정원용(鄭元容)김흥근(金興根)김좌근(金佐根) 등 세도대신들과 함께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총재관(摠裁官)을 지내고, 고종의 영립(迎立)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집권 초기에 영의정이 되어 1년간 경복궁 재건, 『대전회통』 편찬, 삼군부(三軍府)설치 등의 지휘를 맡았다가 1866년 치사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갔으며,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저서로 『심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哲宗實錄
高宗實錄
國朝榜目
萬姓大同譜

[집필자]

한영국(韓榮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