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수(朴岐壽)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AE30C218B1792X0 |
자(字) | 봉래(鳳來) |
생년 | 1792(정조 16) |
졸년 | 1847(헌종 13)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반남(潘南)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박종보(朴宗輔) |
모 | 덕수이씨(德水李氏) |
생부 | 박종경(朴宗慶) |
조부 | 박준원(朴準源) |
[관련정보]
[상세내용]
박기수(朴岐壽)
1792년(정조 16)∼1847년(헌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봉래(鳳來).
형조판서 박준원(朴準源)의 손자로, 이조판서 박종경(朴宗慶)의 아들이며, 모친은 덕수이씨(德水李氏)로 군수 이술모(李述模)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호조판서 박종보(朴宗輔)에게 입양되었으며, 종조부인 박윤원(朴胤源)의 문인이다.
1810년(순조 10)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고 181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가 되었다.
그뒤 홍문관부교리‧이조참의‧대사성‧경상도관찰사‧이조참판 등을 거쳐, 1835년(헌종 1) 공조판서에 승진하였다. 이어 예조‧형조‧이조‧병조 등 5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지경연(知經筵)‧도총관‧함경도관찰사‧한성부판윤‧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좌참찬 등을 두루 거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벼슬이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1830년 익종(翼宗)의 빈궁(殯宮)에 불이 났을 때 단신으로 불속에 뛰어들어 진화하였으므로 모두 그 충성심을 칭찬하였다.
그뒤 판의금부사로 있을 때 간신 김필(金弼)의 배소를 가까운 곳에 정할 것을 건의하였다가 파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양주의 돈암구사(敦巖舊舍)에 돌아가 산수를 소요하면서 여생을 마치려고 하였으나 1847년 병조판서에 재기용되었다.
형조판서 박준원(朴準源)의 손자로, 이조판서 박종경(朴宗慶)의 아들이며, 모친은 덕수이씨(德水李氏)로 군수 이술모(李述模)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호조판서 박종보(朴宗輔)에게 입양되었으며, 종조부인 박윤원(朴胤源)의 문인이다.
1810년(순조 10)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고 181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가 되었다.
그뒤 홍문관부교리‧이조참의‧대사성‧경상도관찰사‧이조참판 등을 거쳐, 1835년(헌종 1) 공조판서에 승진하였다. 이어 예조‧형조‧이조‧병조 등 5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지경연(知經筵)‧도총관‧함경도관찰사‧한성부판윤‧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좌참찬 등을 두루 거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벼슬이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1830년 익종(翼宗)의 빈궁(殯宮)에 불이 났을 때 단신으로 불속에 뛰어들어 진화하였으므로 모두 그 충성심을 칭찬하였다.
그뒤 판의금부사로 있을 때 간신 김필(金弼)의 배소를 가까운 곳에 정할 것을 건의하였다가 파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양주의 돈암구사(敦巖舊舍)에 돌아가 산수를 소요하면서 여생을 마치려고 하였으나 1847년 병조판서에 재기용되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梅山集
憲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梅山集
[집필자]
홍순만(洪淳晩)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