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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진(趙琮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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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조면진(趙冕鎭)
자(字)장지(章之)
호(號)예원(藝垣)
호(號)현계(玄溪)
호(號)동해(東海)
생년1767(영조 43)
졸년1845(헌종 11)
시대조선후기
본관풍양(豊壤)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시정(趙時正)
조부조희명(趙禧命)
처부유한모(兪漢謨)
처부이해준(李海俊)
외조부여선복(呂善復)
묘소양주(楊洲) 양현리(兩峴里)

[상세내용]

조종진(趙琮鎭)
1767년(영조 43)∼1845년(헌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장지(章之), 호는 예원(藝垣)현계(玄溪)동해(東海).

조부는 조희명(趙禧命)이고, 안성(安城)에서 통덕랑(通德郞) 조시정(趙時正)의 7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장남인 조만진(趙晩鎭)조시일(趙時一)에게 계출하였으므로 실질적으로 그가 장남이 된다. 모친은 1741년(영조 17) 신유식년사마시(辛酉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한 함양(咸陽) 여선복(呂善復)의 딸이다. 동생들은 조병진(趙𤦋鎭), 조황진(趙璜鎭), 조경진(趙璟鎭), 조창진(趙瑲鎭), 조평진(趙玶鎭)이다. 전처 형조판서(刑曹判書) 유한모(兪漢謨)의 딸과 혼인하여 한 명의 딸을 낳았으며, 후처 이해준(李海俊)의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그는 두 친아들을 모두 출계시키고 아우 조경진의 아들 조운주(趙雲周)를 계자(繼子)로 삼았다. 계자인 조운주지평(持平)서장관(書狀官)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그의 어렸을 때의 이름은 조면진(趙冕鎭)이었으나, 정조가 ‘종(琮)’자를 내려주어 조종진으로 개명하였다.

조종진은 가학을 하였다. 그는 외삼촌인 여춘영(呂春永)에게 서법과 장편의 당시를 배웠다. 한편 그의 집은 상당히 부유하여 귀중한 서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그의 집에 소장하고 있던 『낙의론(樂毅論)』은 판본이 훌륭하여 유명한 서예가인 윤순(尹淳)이광사(李匡師) 등이 임서하였다. 때문에 조종진은 어릴 때부터 집안에 있던 좋은 판본의 서첩으로 서예를 익혀 한때 서예에 심취했으나, 조윤형(曺允亨)과 장인인 유한모에게서 ‘문장과 서예를 모두 잘 할 수는 없다’, ‘서예는 일개 기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충고를 듣고 그때부터 문장공부에 치력하였다.

그는 1805년(순조 5)에 별시 을과에 1등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는 지평교리를 역임하면서, 1807년(순조 7) 한림도당(翰林都堂)에 나아가 회권(會圈)함에 순조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이듬해에 춘당대(春塘臺)에서 벌어진 한림 소시(召試)에 뽑혔다. 그러나 조종진은 1809년(순조 9) 9월에 연차(聯箚)를 올려 윤행임(尹行恁)을 복관시킨 것과 서형수(徐瀅修) 등을 귀양보내라는 임금의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지만, 도리어 순조의 진노를 사게 된다.

조종진은 1810년(순조 10) 평사(評事)로 2년간 북방을 순회하게 되는데, 그는 이 시기에 북방을 두루 다니면서, 평사로써 개시(開市)에 관한 일과 문‧무과의 시재(試材) 및 과거를 주관, 군사에 관한 초치와 문서 수발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한편 선을 행한 백성을 표창하였다.

1812년(순조 12) 봄에 조종진은 평사의 임무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에 임명된다. 1815년에 부제학(副提學) 김이교(金履喬)교리(校理) 이병정(李秉鼎) 등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을 간행하였다. 1818년에는 정조어제 경모궁예제겸폭쇄사첩(正祖御製景慕宮睿製兼曝曬史牒)을 오대산 사고에 봉안하는 임무를 맡았다. 1820년경에 그는 회양현감(淮陽縣監)에 부임되었다. 이때 박지원의 처조카인 이정리(李正履), 이정관(李正觀) 형제와 교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1822년(순조 22)에 강원도암행어사 홍학연(洪學淵)이 민생을 잘 보살피지 못한 정상을 논하는 서계(書啓)에 춘천부사(春川府使) 한기유(韓耆裕), 강릉부사(江陵府使) 이진연(李晉淵) 등과 함께 그의 이름이 올라 처벌을 받게 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조종진한양으로 돌아와 집에 머물며 조봉진(曺鳳振), 이탁원(李鐸遠), 신위(申緯), 한용간(韓用幹) 등과 교유하며 시를 수창하였다. 그는 1824년에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해 3월에 북도(北道) 각릉(各陵)의 한식제(寒食祭)에 쓸 향축은 준원전(濬源殿) 전향(傳香) 때 함께 봉진(封進)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전향할 때 다만 준원전 향축만을 봉진하고 각 능의 향축을 봉진하지 않은 일로 순조의 노여움을 사 평안도 정주목사(定州牧使)로 좌천되었다.

그는 8년 동안 정주목사로 재직하게 되는데, 홍경래(洪景來) 난 이후의 흉흉해진 정주의 민심을 다잡는데 노력하였다. 우선 조종진은 성곽을 보수하였고, 홍경래 난에 순절한 14명의 기념비를 세우고 그들의 행장을 지었으며, 그들 중 6명을 뽑아 『육충의전(六忠義傳)』을 지었다. 1832년(순조 32)에 조종진우승지(右承旨)에 제수되었다. 그는 1845년(헌종 11)에 향년 7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묘는 양주(楊洲) 양현리(兩峴里)에 있으며, 문집으로 필사본 『유고(遺稿)』 11책을 남겼다.

그는 최황(崔璜), 이탁원(李鐸遠), 이조묵(李祖黙), 홍석모(洪錫謨), 홍경모(洪敬謨), 신위(申緯), 이정리(李正履), 이정관(李正觀) 조종영(趙鍾永) 등과 문학으로 교유하였다. 그의 문학관을 살펴보면, 당송고문이 아닌 진한고문, 특히 『사기』『한서』『장자』『열자』를 문장의 전범으로 삼아 옛 성현의 참된 진리를 얻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산수 유람을 통한 양기(養氣)를 주장하며, 진실이 담기 문학을 추구하는 재도론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조종진이 생각하는 양기란 비단 자신의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과 그 지방의 풍토를 살펴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하는 계기로 삼으려 한 것이다.

[참고문헌]

經山集
東海公遺稿
烏雲稿略
莊陵誌續編
朝鮮王朝實錄
衆香漫筆

[집필자]

이관성
대표명조종진(趙琮鎭)
성명조종진(趙琮鎭)

성명 : "조종진(趙琮鎭)"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孝懿王后太廟都監儀軌時禮房 承旨李鶴秀 加資 入侍承旨李止淵‧任厚常‧趙琮鎭‧朴齊聞 各半熟馬一匹賜給 注書鄭德和假注書李穆淵
各樣告由謄錄沴歆此泂酌故敎玆示想宜知悉 壬甲三月日知製敎 臣 趙琮鎭製進
祭謄錄n1-6책兼告由祭獻官副護申大尹典祀官兼大祝權 知承文副正字趙琮鎭贊者東令趙榮錫謁者贍直權中倫溫陵端午祭獻官行護金爔
祭謄錄n1-6책禮參閔耆顯典祀官奉正柳河源執禮 司果洪時濟大祝司果趙琮鎭祝史樂主兪漢寔齋郞 訓從朴正圭贊者兼引方禹矩謁者引
祭謄錄n1-6책雨祭獻官右承任厚常典祀官兼大祝 檢閱朴綺壽執禮校理趙琮鎭祝史戶佐李亨會 齋郞漢主林景運贊者兼引吳仁昇謁者假
祭謄錄n1-6책位祝史掌令權烒第二位 祝史副果金箕殷第三位祝史校理趙琮鎭第一位齋郞修撰 李止淵第二位齋郞正言曺鳳振第三位齋
祭謄錄n1-6책察柳鎬源健陵忌辰祭獻官永明尉洪顯周典祀官兼大祝校理趙琮鎭 贊者僕判李在純謁者戶佐趙鎭衡祭監監察李近植
祭謄錄n1-6책者都都元永道元陵同祭獻官行護吳參賢典祀官兼大祝校理趙琮鎭贊者 典簿金民淳謁者饔奉朴鍾岳祭監朴宗稷弘陵同祭獻
祭謄錄n1-6책察鄭宅恒弘陵同祭獻官光恩副尉金箕性典祀官兼大祝校理趙琮鎭贊者 衣僉鄭漪漢判李集老祭監監察安光貞順懷墓遣官攝
祭謄錄n1-6책司果韓兢履第十二室大祝司果李憲琦第 十三室大祝校理趙琮鎭第十四室大祝獻納申在業第十五室大祝 副應鄭觀綏第一
孝懿王后國恤草日記盡條件追乎磨鍊爲白齊道光三 年三月二十三日右承旨臣趙琮鎭次知啓依允
孝懿王后國恤草日記侍二十左右侍 衛爲白齊道光三年四月十二日左副承旨臣趙琮鎭次知 啓依允
孝懿王后國恤草日記陞敍親享時禮房 承旨李鶴秀加資入侍承旨李止淵任厚常趙琮鎭朴齊聞 各半熟馬一匹賜給注書鄭德和假注書李穆淵史官
伊川邑誌(江原道)李得馨 趙琮鎭 尹致謙 李羲肇 金興根 金善一
伊川邑誌(江原道)趙琮鎭 文 丙戌正月十八日赴任丁亥 五月初十日辭狀啓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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