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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리(李正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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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심부(審夫)
호(號)순계(醇溪)
생년1783(정조 7)
졸년1843(헌종 9)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재성(李在誠)
조부이보천(李輔天)
외조부유은(柳憖)

[상세내용]

이정리(李正履)
1783년(정조 7)∼1843년(헌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심부(審夫), 호는 순계(醇溪). 이보천(李輔天)의 손자로, 이재성(李在誠)의 아들이며, 유은(柳憖)의 외손자이다.

1807년(순조 7) 진사시에 합격하여 강릉참봉(康陵參奉)의령현감을 지냈다.

1835년(헌종 1) 현감으로 있으면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전적이 되었다가 그 이듬해 춘추관기주관으로 『순조실록』의 편찬에도 참가하였다.

도당록회권(都堂錄會圈)에서 4점을 얻었고 1837년 헌납이 되었다가, 홍석주(洪奭周)를 탄핵하기 위하여 삼사가 합계(合啓)할 때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아 영암에 귀양갔다가 2년 뒤에 풀려나와 수찬이 되었다.

이해 동지사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조세관계와 국내의 사정을 관찰하고 귀국하여 보고하기를 “청나라에서는 농민들의 납세액이 토지 10묘(畝)에 3두2승(三斗二升)인데 정역(丁役)은 1년에 은 6돈3푼(六錢三分)뿐이고, 광제원(廣濟院)을 두어 백성을 치료해주며 육영당(育嬰堂)을 설치하여 고아들을 기른다.”고 복명하였다.

1842년에는 수찬으로 장릉(長陵)과 인릉(仁陵)의 친제(親祭)때 집례(執禮)를 잘 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받고 가자되었으며, 그뒤 공조참의를 거쳐 북청부사가 되어 재직중 죽었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國朝榜目
梅山集

[집필자]

김호종(金昊鍾)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