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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경(朴宗慶)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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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회(汝會)
호(號)돈암(敦巖)
시호(諡號)문숙(文肅)
생년1765(영조 41)
졸년1817(순조 17)
시대조선후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준원(朴準源)
외조부원경유(元景游)

[상세내용]

박종경(朴宗慶)
1765년(영조 41)∼1817년(순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여회(汝會), 호는 돈암(敦巖).

판서 박준원(朴準源)의 아들이고, 모친은 증이조참판 원경유(元景游)의 딸이며, 누이는 순조의 생모인 유빈(綏嬪)이다.

1790년(정조 14)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동몽교관(童蒙敎官)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등을 거쳐 순안현령(順安縣令)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역임하였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가 수렴청정을 하자, 지극한 총애를 입어 이듬해 홍문관부수찬으로 기용되고, 응교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에서 도승지까지, 규장각에서는 직각(直閣)으로부터 직제학까지, 그리고 참찬을 거쳐 판서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1804년 잠깐 여주목사를 지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매일 사방에 격문이 나돌자, 당시 훈련도감에 있어서 군심(軍心)을 진정시키기에 힘썼다.

1812년 호조판서가 되어 군국기무에서 공부(貢賦)까지 실권을 쥐었다.

이때 대사헌 조득영(趙得永)으로부터 임금의 인척으로 위복을 누리면서 음탕과 뇌물만 탐내고 사적인 감정으로 살인하는 등 행패가 많다는 탄핵을 받자 사직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양주목사(楊州牧使)로 좌천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시 내직에 들어와 몇 년 후 훈련도감을 맡았다.

1814년에는 왕의 병에 시약(侍藥)한 공로로 안마(鞍馬)‧토지‧노비를 하사받았다.

그가 죽자 왕은 친히 제문을 지어서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가통을 세우기 위해서 5대 이하의 유고를 모두 모아 『반남박씨5세유고(潘南朴氏五世遺稿)』를 편집하고, 선대의 묘소에 비석이 없는 곳은 모두 비석을 세웠다. 글씨로는 「박준원신도비(朴準源神道碑)」가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梅山集
潘南朴氏世譜

[집필자]

원유한(元裕漢)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