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탁(韓用鐸)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55CC6A9D0C1B1759X0 |
자(字) | 여로(汝魯) |
시호(諡號) | 정헌(靖獻) |
생년 | 1759(영조 35) |
졸년 | 1817(순조 17)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청주(淸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한중유(韓重裕) |
조부 | 한광계(韓光{𢼄/于}) |
출신지 | 원주 |

[관련정보]
[상세내용]
한용탁(韓用鐸)
1759년(영조 35)∼1817년(순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여로(汝魯). 원주 출신. 한광계(韓光{𢼄/于})의 손자이며, 한중유(韓重裕)의 아들이다.
일찍이 생원이 되어 1790년(정조 14) 원자정호경과(元子定號慶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문신강제(文臣講製)에 뽑혔다.
이듬해 충청도도사로 참시관(參試官)이 되었는데, 과장(科場)에서의 난동을 제지하지 못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1794년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곧 장령이 되어 사치풍조를 억제하고, 재정을 확충할 것과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없는지 두루 살필 것을 왕에게 상소하였다.
1799년 수찬이 되고, 1801년(순조 1) 경상도 창원‧하동 등지에서 괘서를 한 범인과 그 관련자에 대한 처리의 임무를 맡아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동래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전일에 안핵사로 파견되었던 그가 관찰사 휘하의 수령으로 임명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우의정 서용보(徐龍輔)의 주장에 따라 취소되고 실록청당상에 이어 강화유수가 되었다.
때마침 기근이 혹심하매 진휼을 위하여 조정에 공명첩(空名帖) 300장을 진자(賑資)로 요구하여 허락받았다.
1804년에 이조참판, 이듬해 예조참판에 이어 다시 이조참판을 거쳐, 1806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형조판서가 되어 맹인으로 사형죄수가 된 김대성(金大成)이 폐질인(廢疾人) 임을 들어 감형(減刑)을 진언, 정배(定配)하게 하였다.
1809년 한성판윤이 되고 1812년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대사헌이 되어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예조판서‧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816년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임지에서 죽었다.
시호는 정헌(靖獻)이다.
일찍이 생원이 되어 1790년(정조 14) 원자정호경과(元子定號慶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문신강제(文臣講製)에 뽑혔다.
이듬해 충청도도사로 참시관(參試官)이 되었는데, 과장(科場)에서의 난동을 제지하지 못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1794년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곧 장령이 되어 사치풍조를 억제하고, 재정을 확충할 것과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없는지 두루 살필 것을 왕에게 상소하였다.
1799년 수찬이 되고, 1801년(순조 1) 경상도 창원‧하동 등지에서 괘서를 한 범인과 그 관련자에 대한 처리의 임무를 맡아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동래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전일에 안핵사로 파견되었던 그가 관찰사 휘하의 수령으로 임명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우의정 서용보(徐龍輔)의 주장에 따라 취소되고 실록청당상에 이어 강화유수가 되었다.
때마침 기근이 혹심하매 진휼을 위하여 조정에 공명첩(空名帖) 300장을 진자(賑資)로 요구하여 허락받았다.
1804년에 이조참판, 이듬해 예조참판에 이어 다시 이조참판을 거쳐, 1806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형조판서가 되어 맹인으로 사형죄수가 된 김대성(金大成)이 폐질인(廢疾人) 임을 들어 감형(減刑)을 진언, 정배(定配)하게 하였다.
1809년 한성판윤이 되고 1812년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대사헌이 되어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예조판서‧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816년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임지에서 죽었다.
시호는 정헌(靖獻)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純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문수홍(文守弘)
대표명 | 한용탁(韓用鐸) |
성명 | 한용탁(韓用鐸) |
성명 : "한용탁(韓用鐸)"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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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