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노응(金魯應)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B178C751B1757X0 |
자(字) | 유일(唯一) |
호(號) | 일와(一窩) |
시호(諡號) | 정헌(正獻) |
생년 | 1757(영조 33) |
졸년 | 1824(순조 24)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경주(慶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태주(金泰柱) |
증조부 | 김흥경(金興慶)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노응(金魯應)
1757년(영조 33)∼1824년(순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유일(唯一), 호는 일와(一窩).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증손이며, 문화현령 김태주(金泰柱)의 아들이다.
1786년(정조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1796년 별시문과에 응시하였으나 글자 한 자가 빠졌다고 하여 낙방되고 말았다.
그뒤 헌릉참봉을 제수받았다가, 곧 전생서직장‧활인서별제‧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장악원주부로 있으면서 1805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병조좌랑‧정언‧지평 등을 거쳐 1807년 사복시정‧응교를 지내고,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1808년 황해도암행어사로 지방관의 탐학을 제거하고자 노력하였고, 1811년 대사성이 되었다가 곧 경주부윤이 되었다. 그해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병사를 징발하여 대비시켰다.
동래부사‧경상도관찰사‧지중추부사‧형조판서 등을 거쳐서, 1812년 한성부판윤에 이어 병조판서 겸 동지성균관사에 이르러 병으로 은퇴하였다. 평소 효행과 우애가 돈독하고 검소하였으며, 경사(經史)를 널리 섭렵하였다.
『중용』을 좋아하였고, 역대의 사실이나 조선의 전고(典故)에도 밝았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증손이며, 문화현령 김태주(金泰柱)의 아들이다.
1786년(정조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1796년 별시문과에 응시하였으나 글자 한 자가 빠졌다고 하여 낙방되고 말았다.
그뒤 헌릉참봉을 제수받았다가, 곧 전생서직장‧활인서별제‧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장악원주부로 있으면서 1805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병조좌랑‧정언‧지평 등을 거쳐 1807년 사복시정‧응교를 지내고,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1808년 황해도암행어사로 지방관의 탐학을 제거하고자 노력하였고, 1811년 대사성이 되었다가 곧 경주부윤이 되었다. 그해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병사를 징발하여 대비시켰다.
동래부사‧경상도관찰사‧지중추부사‧형조판서 등을 거쳐서, 1812년 한성부판윤에 이어 병조판서 겸 동지성균관사에 이르러 병으로 은퇴하였다. 평소 효행과 우애가 돈독하고 검소하였으며, 경사(經史)를 널리 섭렵하였다.
『중용』을 좋아하였고, 역대의 사실이나 조선의 전고(典故)에도 밝았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國朝榜目
雲石遺稿
國朝榜目
雲石遺稿
[집필자]
조정기(趙楨基)
명 : "노응(魯應)"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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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